"흔치않은 총상환자여서 "뭔가 큰 일이 터졌구나"하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어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총격으로 숨졌던 10.26사건이 퍼뜩 떠올랐습니다"

정봉섭 박사(43.분당차병원 진료부장)는 분당 권총피격사건의 희생자인
고 이한영씨를 처음 대하던 지난달 15일 당시 순간을 이같이 되새겼다.

머리에 총상을 입은 이씨에 대한 정박사등 분당 차병원 의료진의
대응조치는 신속했다.

응급을 요하는 환자라 보호자의 허락여부와 관계없이 곧바로 수술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러나 이씨는 겉으로 볼때도 가망이 전혀 없었다.

CT (컴퓨터단층) 촬영에서도 총알이 뇌의 중심에 박혀있는 것으로
나타나 뇌손상이 우려됐다.

뇌막 속에 뭉친 피를 제거하는 수술 정도에 그쳐야 했다.

수술팀은 애를 태웠지만 속수무책이었고 결국 이씨는 입원 열하루만에
한많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총상환자에 대한 분당 차병원 의료진의 치료가 이처럼 신속했던 것은
정박사의 산경험이 바탕이 됐다.

생애 두번째 총상환자 치료였기때문.그가 총상환자를 처음 접한 때는
1979년 10.26 사건에 이은 12.12사태 당시였다.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밟고있을 때 공수부대 하사관이
머리에 총알을 맞고 병원에 실려왔다.

총알 제거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국군통합병원으로 후송하면서 자부심을 느꼈었다.

"머리에 총알을 맞은 환자를 치료하는 것도 인연인가 봅니다.

그래서 이한영씨를 대하는 태도도 남다를 수 밖에 없었죠"

이씨가 입원한지 닷새째였던 지난달 19일을 정박사는 잊지 못한다.

생일을 맞은 이씨의 딸 예인이가 도화지에 아빠 얼굴을 그렸다.

그리고 바깥 여백을 이용해 편지를 썼다.

"빨리 일어나서 옛날처럼 놀아주세요, 아빠"

예인이가 아빠 머리맡에서 이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울먹이면서 "옛날처럼 놀아주세요"라고 말하는 순간 목석처럼 누워있던
이씨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경련이 스치고 지나간듯했다.

이를 지켜봤던 간호사들은 이씨가 움찔하는 반응을 보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특별한" 환자 이씨 때문에 의사와 간호사등 의료진은 물론 입원환자들도
당혹스러움을 겪었다.

기자들은 취재경쟁으로 법석이었고 정보가 새는 것을 막으려는 경찰도
필사적이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보도진의 등쌀을 피해 비밀통로를 이용해야만 했다.

"어떤 기자는 세탁실에서 들고온 의사가운을 입고 의사를 가장해 이씨
병실로 들어가려다가 저지당하기도 했죠. 청와대나 외국언론을 팔아
환자상태를 묻기도 하더군요" (윤미선 수석간호사)

이씨와 같은 층에 있던 중환자실의 환자나 보호자들도 큰 불편을 겪었다.

안기부직원이나 경찰관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출입자들을 일일이
검문했기 때문이다.

얼결에 한바탕 홍역을 치른 정박사는 이달초 신경외과 과장에서
진료부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그러나 이번 승진이 이씨 사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며 그저
담담한 표정이다.

"실제로 그가 총을 맞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그럴땐 황당하면서도 우리사회에 깔린 불신 풍조의 한단면을 보는 것같아
안타깝습니다"

정박사의 씁쓸한 소감이다.

그는 "우리사회에서 다시는 이같은 불행한 총소리가 울리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 김주영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