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을지로입구에 있는 쌍용투자증권의 김석동부사장 자리뒤쪽에는
조그마한 액자가 하나 놓여있다.

그속에는 지난 93년3월31일 미국의 한 기관투자가가 보내온 주식매수주문
팩스용지가 들어있다.

"저로서는 의미가 크고 희열이 느껴지는 주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념
으로 액자에 넣어 놓았지요. 이 팩스덕분에 주식시장 개방 첫해의
치열했던 국제영업부문 선두다툼에서 우리회사가 선두에 나설수 있었지요.

팩스 한장에 불과했지만 7,000만달러(560억원정도)에 달하는 엄청난
물량이었습니다. 단일규모로는 현재까지도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큰
기록이지요"

당시 증권계에서는 개방원년의 국제영업을 누가 일등으로 마감하느냐는
것이 큰 관심사였다.

김부사장(당시 전무)이 뉴욕으로 급히 날아가 결산기 마지막날 따온
이 주문으로 쌍용투자증권은 역전승을 거둔만큼 보람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쌍용그룹 창업자인 김성곤씨의 막내아들이기도한 김석동 쌍용투자증권
부사장는 이제 겨우 34세의 신세대 경영인이다.

월 스트리트저널지 서울특파원인 스티브 그레인에게 이제까지 만난
한국의 젊은이중에 가장 호감이 가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밀튼
김( Milton Kim )"이라고 서슴없이 대답한다.

밀튼 김은 쌍용투자증권 김부사장의 미국식 이름이다.

왜냐고 물으면 "잘 다듬어진 젊은이"라는 느낌을 받을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학벌 부 건강 능력등 가질것은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겸손한 그의
태도는 잘 다듬어진 젊은이라는 그레인기자의 평가에 공감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김부사장은 국내보다는 해외에 더 잘알려진 국제통으로 지난 1월20일
에는 미국 하버드대학의 페어뱅크센터가 주최한 한반도문제 세미나에서
경제부문 주제발표를 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있다.

"페어뱅크센터가 주최한 이번 세미나는 한반도문제를 주제로 해
이뤄졌는데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그레그씨가 정치부문의 주제연설을
했습니다.

저한테는 남북한의 경제문제에대한 얘기를 좀해주지 않겠느냐는
편지가 왔습니다.

주로 기업인을 대상으로한 세미나였던만큼 우리회사 홍보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돼 준비를 많이 했었지요"

작년에는 영업실적에 따라 급여에 차등을 두는 신인사제도를 도입해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이 한국증권계를 뒤흔드는 "젊은 개혁가"라고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김부사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증권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증권산업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다.

"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지난 86년 미국의 시티은행에 입사했습니다.
그때가 미국에서는 한창 은행과 증권업의 벽이 무너지는 상황이었는데
증권쪽에 큰 매력을 느껴 언젠가 쌍용그룹에 들어오게되면 증권회사로
가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증권업은 그 나라의 경제를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로 생각합니다"

현지인 못지않은 영어와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김부사장은 해외증권
발행시의 로드쇼에서 한국경제나 발행회사의 현황을 직접 설명하는등
자신이 앞장서 일을 해나가는 영업맨으로도 유명하다.

"제가 국제통이라는 얘기를 듣는 것은 미국에 오래 살았다는 점이
큰 힘이 된것 같습니다.

한국을 찾아온 외국인들에게 우리기업이나 경제현황을 국내에서
교과서를 통해 영어를 배운 사람들보다는 좀더 쉽게 설명할 수있다는
점도 큰 도움이 됐겠지요.

외국의 펀드매니저나 학교 선후배들이 한국에가면 쌍용증권의 밀튼김을
한번 찾아보라고 서로 소개를해 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김부사장은 그가 살아온 34년의 절반가량을 외국에서 지냈다.

작년에도 3분의 1정도인 1백40여일을 해외출장으로 보냈다.

지난 71년 오치성 당시 내무부장관의 해임건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이른바 "10.2항명파동"의 주동인물로 지목돼 공화당으로부터 출당조치된
아버지 김성곤씨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 11세의 김부사장은 87년
군복무를 위해 귀국할 때까지 계속 외국생활을 했다.

미국의 브라운대학과 조지타운대학원에서 외교학을 공부하고 프랑스의
손꼽히는 경영대학원인 인시아드( INSEAD )대학원을 다니기도 했다.

"대학과 조지타운대학원에서는 외교학을 전공했는데 역사나 언어,
그리고 경제및 사회문제등에대해 관심이 많았고 또 외교학이 이런 문제를
종합적으로 다루는 분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학문으로서의 외교학이
좋았고 상당히 재미도 있었지요"

금융산업과 김부사장의 인연은 조지타운대학원 1학년 여름방학때부터
시작됐다.

여름방학을 맞아 서울에왔던 김부사장은 시티은행 서울지점에서 인턴
으로 근무하는 기회를 갖게됐고 대학원을 졸업한 86년에는 시티은행의
뉴욕본사에 정식 입사,은행원으로 사회생활의 첫출발을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세계 최대의 은행인 시티은행에서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금융업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됐고 회계분야등에 대한
트레이닝도 철저하게 받았습니다.

증권의 매력을 알게된 것도 시티은행에 근무하면서 부터지요.

군에 입대하기위해 귀국하면서 휴직을 했는데 석사장교로 군복무를
마친후에는 은행에 다시 복직을 할까 쌍용그룹에 들어올까를 두고
고민할 정도였지요"

큰형인 쌍용그룹 김석원회장과도 상의한 끝에 결국 쌍용그룹 입사로
마음을 정한 김부사장은 88년10월 공채7기 경력사원으로 쌍용투자증권에
입사했다.

"당시는 증권업이 한창 호황인데다 효성그룹으로부터 쌍용증권을
인수한지도 몇년안됐던 시점인만큼 1년에도 2~3차례씩 직원을 뽑을
때였습니다.

시티은행의 근무경력을 인정받아 대리로 입사했지요.

회장님도 밑에서부터 시작하라는 점을 강조하셨고 나 자신도 업무를
철저히 배우고 싶었습니다.

특히 금융업의 경우 업무를 제대로 모르면 임원이 되더라도 상황판단이나
직원들로부터 인정을 받는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입사이후의 진급은 창업자2세인 덕분에 다른 사람들에비해 엄청나게
빨랐지만 짧은 기간이나마 증권회사의 여러 부서를 다양하게 거쳤다.

국제부를 시작으로 90년 본사영업부에서 대리로 근무할때는 주가폭락기
영업직원의 쓰라린 비애를 맛보기도 했으며 인수공모부 기획실등을 거쳐
92년부터 임원으로 참여했다.

지난달 쌍용증권은 대만 오로라사의 주식예탁증서 발행을 주선,국내
증권사로서는 처음으로 외국기업 해외증권 발행의 공동대표주간사를
맡는 새로운 기록을 추가하기도 했다.

이것도 김부사장이 직접 뛰어얻은 결실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성장과정의 조그마한 일일뿐 "국내 증권사가 아닌
외국증권사와의 경쟁을통해 쌍용증권을 메릴린치나 노무라증권에 필적
하는 회사로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는 김부사장의
욕심에는 끝이 없다.

"앞으로 금융시장이나 금융산업의 개방속도도 더욱 빨라질 것인만큼
이에대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합니다.

지점이나 사무소등 해외영업망을 꾸준히 확대,선진국은 물론이고
중국이나 동남아 남미등 신흥개도국에도 적극 진출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같은 회사발전의 밑거름역할을 하게될 조사및 기업분석업무 분야의
강화문제도 김부사장의 큰 관심사이다.

"지난해 우리가 미국인인 스티브 마빈씨를 조사담당 이사로 영입,화제를
뿌린 것도 사실이지만 이를 계기로 조사부가 눈에 띄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좋지않은 시각을 갖고있는 사람들도 있는 것은 알지만 일단
스타트는 괜찮은 편입니다.

증권회사의 조사업무는 일반기업의 연구개발기능과 같은 역할을 하는
만큼 선진 외국증권사와 경쟁하기위해 중점투자를 해야할 부문입니다"

부사장으로의 승진과함께 금년부터 회사 전체를 총괄하게된 김부사장은
앞으로는 국제업무뿐만아니라 국내 지점영업에대한 관심도 크게
높이겠다는 생각을 갖고있다.

"사실 지점 영업직원들의 노고는 대단하고 이들에대한 대우가 직원들의
사기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됩니다. 금년에는 외국출장을 줄이더라도 좀더
많은 시간을 영업직원들과 같이 하도록 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자신의 아이디어로 지난해부터 도입한 신인사제도역시 직원들의 숨겨진
능력계발및 생산성 향상과함께 미국 일본등의 증권사와 맞서 싸우기위한
제도라는 것이 김부사장의 설명이다.

"물론 일부에서는 불만이 있을 수도있지만 전체직원의 70~80%정도에
달하는 많은 중간층 직원들의 숨겨진 능력을 계발,개인과 회사의
이익을 동시에 꾀하자는 것입니다.

시행초기에는 회사의 지출이 오히려 늘어나게되나 앞으로 본격화될
외국증권사들의 국내진출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제도로
생각하며 또 성공할 것으로 믿습니다.

우선 영업직원들의 보너스를 차등지급하는 것부터 시작해 문제점을
계속 보완해가며 적용대상을 후선관리부서까지 확대해 나가도록할
계획입니다"

끊임없는 쇄신이없이 그대로 안주하다가는 국내진출 외국증권사들이
파격적 능력급을 내세우며 우수인력을 마구 빼갈 경우 우리 증권사들은
심한 어려움을 겪게된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골프핸디가 싱글인 김부사장은 대학졸업직후 전국체전 스키대회에
출전,은메달을 2개나 딸정도로 스포츠를 즐긴다.

"시간이 나면 쌍둥이를 낳은 덕분에 셋이된 아이들을 데리고 논다"는
신세대 젊은이이기도 하다.

"선대회장께서는 "일하자,더욱 일하자,한없이 일하자"고 하셨지만
요즘에 그런 말만 강조했다가는 잘못하면 집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회사일뿐만 아니라 가정에서의 봉사(?)에도 상당히 신경을
쓰고있는 눈치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2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