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먹지 않고도 우울증 치료하는 시대 ‘성큼’…VR로 병 고치는 디지털 치료제 개발도 활발

[비즈니스 포커스]
(사진) 와이브레인의 우울증 치료용 전자약 ‘마인드스팀’. /와이브레인 제공
(사진) 와이브레인의 우울증 치료용 전자약 ‘마인드스팀’. /와이브레인 제공
병원에 가거나 약을 먹지 않고도 병을 치료하는 시대가 열렸다. 한국에서도 전기 자극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전자약이 10월 말 정식 출시될 예정이다. 가상현실(VR) 등을 활용해 질병을 치료하는 디지털 치료제 개발도 활발하다.

부작용 없는 차세대 의약품

전자약은 전류 또는 자기장을 이용해 특정 질환의 증상을 완화하는 개념의 치료제를 뜻한다. 구글의 생명과학 자회사 베릴리와 다국적 제약사 글락소 스미스클라인(GSK)이 2013년 8000억원을 투자해 전자약 전문 합자회사 갈바니를 설립하면서 사용되기 시작한 신조어다. 디지털 치료제는 VR이나 증강현실(AR) 등을 활용해 질병을 치료하는 개념이다.

이들 치료제는 기존 합성 의약품이나 수술 등으로 인한 부작용이 거의 없는 것이 장점이다. 치료가 필요한 특정 세포나 신경만 자극하는 방식이다. 의사의 처방을 통해 집에서도 쉽게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2017년 페어테라퓨틱스의 애플리케이션(앱) ‘리셋’을 알코올·약물 중독 디지털 치료제로 허가한 이후 10여 개의 관련 치료제가 승인받았다. 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시장 규모는 약 5조원, 연평균 성장률은 13%를 웃돈다.

한국 기업들도 디지털 치료제 개발에 속속 나서고 있다. 뉴냅스는 뇌 손상 후 시야 장애 개선을 위한 디지털 치료제 ‘뉴냅비전’의 확증 임상 시험 계획을 2019년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승인받았다. VR 소프트웨어를 적용한 치료제로 서울아산병원 등에서 관련 임상을 진행 중이다.

라이프시맨틱스는 9월 3일 호흡 재활용 디지털 치료제 ‘레드필숨튼’의 확증 임상 시험 계획을 승인받았다. 레드필숨튼은 호흡기 질환자가 집에서도 스스로 재활할 수 있도록 한 소프트웨어다. 개인 측정 기기를 통해 활동량과 산소 포화도를 측정한 뒤 환자 맞춤형 운동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의료진과 환자가 함께 확인할 수 있는 리포트를 제공해 체계적 재활이 가능하도록 돕는다.

라이프시맨틱스는 서울아산병원 등에서 만성 폐쇄성 폐질환(COPD)·천식·폐암 등 호흡 재활 치료가 필요한 환자 100명을 대상으로 레드필숨튼 사용 후 6분간의 보행 검사를 통해 운동 능력 개선의 유효성과 안전성 등을 평가한다.
(사진) 라이프시맨틱스의 호흡 재활 디지털 치료제 ‘레드필숨튼’. /라이프시맨틱스 제공
(사진) 라이프시맨틱스의 호흡 재활 디지털 치료제 ‘레드필숨튼’. /라이프시맨틱스 제공
빅씽크테라퓨틱스는 미국 판매 허가를 목표로 지난 5월 강박 장애(OCD) 디지털 치료제 ‘오씨프리’의 탐색 임상에 돌입했다. 올 연말까지 환자 모집을 마치고 뉴욕과 오하이오 등 미국 내 3개 지역에서 만 18세 이상 강박 장애 환자 30명을 대상으로 6주 치료와 4주 관찰의 형태로 임상을 진행할 계획이다.

한미경 빅씽크 대표는 “탐색 임상을 거쳐 2024년까지 본임상을 끝내고 FDA 허가를 받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대기업도 전자약 시장 진입 채비

전자약은 한국에서도 상용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와이브레인은 지난 4월 식약처에서 우울증 치료용 전자약 ‘마인드스팀’의 판매 허가를 받았다. 머리에 쓰는 밴드 형태 제품으로 전기 자극을 통해 우울증을 치료한다. 매일 30분간 사용해 경증·중등증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다.

와이브레인 관계자는 “세브란스 등 6개 병원에서 67명의 경증·중등증 우울 장애 환자를 대상으로 6주간 최대 42회 적용한 확증 임상 결과 57.4%에서 우울증이 정상으로 회복됐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조만간 마인드스팀을 한국 시장에서 본격 출시할 계획이다. 병·의원용은 물론 개인용 렌털 형태 제품도 판매할 예정이다. 미국 시장 진출도 추진하고 있다.
전기 자극으로 병 고친다…‘전자약’이 뭐길래
지난 5월엔 리메드가 FDA에서 만성 통증 치료용 전자약 ‘탈렌트프로’의 판매 허가를 받았다. 전도 전자기 코일로 강력한 전류를 발생시켜 생성된 자기장을 신체에 통과시켜 근육과 신경 세포를 활성화하는 방식이다.

‘전자약 시대’가 다가오면서 대기업도 시장 진입을 서두르고 있다. KT는 최근 미국 뉴로시그마와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ADHD)·우울증·뇌전증 등의 신경 정신 질환을 치료하는 전자약의 개발과 사업화를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뉴로시그마는 FDA에서 ADHD 치료용 전자약 ‘모나크’의 판매 허가를 받은 곳이다. 모나크는 전자 패치를 활용해 뇌 신경을 자극해 ADHD를 치료한다. 뉴로시그마는 이 기술을 활용해 우울증이나 뇌전증 등으로 적응증을 확대하기로 하고 FDA 승인을 위한 임상을 계획하고 있다.

KT는 지난해 말 최고경영자(CEO) 직속 미래가치추진실에 ‘디지털&바이오헬스 P-TF’를 신설했다.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에서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기 위한 조치다. 김형욱 KT 미래가치추진실장(부사장)은 “뉴로시그마와의 사업 협력을 시작으로 전자약을 비롯한 디지털 치료제를 헬스케어 신사업으로 적극 육성하고 시장 확대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인터뷰
이기원 와이브레인 대표 “우울증 이어 내년엔 ‘치매 전자약’ 선보인다”
(사진) 이기원 와이브레인 대표. /와이브레인 제공
(사진) 이기원 와이브레인 대표. /와이브레인 제공
전자약 플랫폼 기업 와이브레인은 2013년 설립 이후 정신과용 뇌파 검사 시스템 등을 개발해 병·의원에 납품하고 있다. 최근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우울증 치료용 전자약 마인드스팀의 판매 허가를 받고 10월 말 출시할 계획이다. 이기원 와이브레인 대표는 “한국 출시와 함께 조만간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판매 허가를 신청할 계획”이라며 “내년 하반기에는 치매 치료용 전자약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말했다.

-창업 계기가 궁금합니다.

“와이브레인은 뇌 도파민 관련 기능을 전기 자극으로 조절해 감정 조절에 성공한 뇌과학자와 전자 기기를 더 얇고 작게 대중화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한 공학자가 모여 ‘마음을 치료하는 전자 반창고’를 상용화하기 위해 설립한 기업입니다. 2012년 팀 결성 후 초기 개발을 시작했고 2013년 2월 첫 투자 유치와 함께 정식 법인을 설립했죠. 창업 초기엔 의료 기술 외에 가벼운 뇌 기능 개선 기술에 대한 연구도 진행했지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뇌에 큰 손상을 입게 돼 가족들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우울증·치매 등 중증 신경 정신 질환 치료용 의료 기기 분야에 더욱 집중하게 됐습니다.”

-우울증 치료 원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이마의 두피에 미세한 전기 자극을 가하면 약 20~40% 정도가 두개골을 투과해 전전두엽에 도달합니다. 이 전기 자극이 강제로 뇌 세포의 활동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세포의 휴식 상태 전압을 약간 높여 뇌가 본래 갖고 있던 자발적 활동의 빈도를 증가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전기 자극은 성상교세표에도 작용해 뇌 가소성을 직접 증가시키고 증가한 뇌의 활동 상태가 유지되도록 돕습니다. 이 두 가지 메커니즘으로 전전두엽이 감정의 중추인 편도체와 연결된 회로에서 더 활발한 역할을 수행하게 함으로써 항우울 효과를 구현합니다.”

-제품은 언제 출시할 계획입니까.

“10월 말 출시할 계획입니다. 기존 시스템을 업데이트하는 중이에요. 첫째로 식약처에서 시판 허가 받은 제품을 정신과 원내와 가정에서의 사용이 둘 다 용이하도록 시스템을 일부 보완했습니다. 와이브레인은 정신과용 생체 신호 분석 시스템으로 이미 100곳 이상의 병·의원 고객을 확보하고 있어 전자약 사업 초기 이를 기반으로 원내 또는 가정에서의 전자약 사용량을 수월하게 늘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또한 가정에서의 도입 문턱을 낮추기 위해 초기 구매 비용이 없는 렌털 서비스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필요한 소모품을 온라인으로 자동 배송하는 시스템을 구축해 초기 도입부터 관리까지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둘째, 신규 환자는 물론 기존 환자의 지속 관리가 가능하도록 전자 문진 시스템을 추가했습니다. 이를 통해 새로운 병·의원의 진입을 늘리고 진단·치료·관리의 토털 서비스 플랫폼 기업으로 자리 잡고자 합니다. 내년까지 다양한 형태의 협력을 통해 정신과 전체 병·의원 점유율 30% 이상을 달성하고 기술 기업이 의료 시장의 메이저 점유율을 확보하는 첫 사례를 만드는 것이 1차 목표입니다.”

-미국 시장 진출도 계획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FDA의 신규 적응증 시판 허가 제도인 ‘데 노보(De Novo) 510k’에 맞춰 관련 준비를 마쳤고 10월 중 판매 허가를 신청할 예정입니다. 기존 두 건의 확증 임상 결과에 추가해 작용 원리를 보강하는 임상을 미국 하버드·존스홉킨스·뉴욕대 병원과 추진 중입니다. 1~2회 적용 시 즉각적 효과를 객관적인 지표로 인종 간 차이 없이 낼 수 있다는 것을 임상 근거로 제시해 FDA의 시판 허가 확률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후속 출시를 목표로 하는 제품은 어떤 게 있습니까.

“치매 치료용 전자약입니다. 치매 전자약의 유효성에 대한 두 편의 SCI급 논문을 발표했고 업계 최초로 치매 치료용 전자약 시판 허가를 위한 확증 임상을 진행 중입니다. 전국 6개 대학병원에서 120명의 환자가 참여하는 임상은 6개월간 경도 치매 환자가 집에서 전자약을 적용한 후 인지 개선 효능과 안전성을 검증하는 시험입니다. 기존 탐색 임상에서 6개월 적용 후 치매 진단 점수(MMSE)가 대조군에서 1점 하락한 것에 대비해 시험군에서 1.5점 상승한 결과를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연내 환자 모집 완료, 내년 3분기 임상 완료, 내년 4분기 식약처 시판 허가가 목표입니다.”

-기업공개(IPO) 계획은 없습니까.

“와이브레인이 유치한 누적 투자금은 226억원입니다. 특별히 재무적 투자 유치는 진행하고 있지 않지만 시장 진입 단계의 재택 우울증 전자약, 생체 신호 분석, 전자문진 등 플랫폼 사업의 실질적인 확대를 위한 전략적인 파트너십은 적극적으로 추진 중입니다. 올해 진단·치료·관리를 모두 커버하는 멘탈헬스 토털 플랫폼을 정신과에 상용화하고 내년 상반기까지 점유율 30% 이상을 달성한 이후 기술 특례 상장을 추진할 예정입니다. 재택 전자약·디지털 치료제 분야에서 실질적으로 시장에 진입하는 첫 사례로서 상장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최은석 기자 choie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