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임 제한하는 법률안 잇따라 제출돼
“금융 사고에도 장기 연임은 문제” vs “JP모간 CEO는 15년째”

금융그룹 회장 장기 집권 막는 대책 나오는 이유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 금융지주 회장의 임기를 법으로 제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박용진 민주당 의원은 6월 1일 국회에서 기자 회견을 열고 금융지주 대표의 연임을 1회로 제한하고 총 임기는 6년을 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의 ‘금융회사 지배구조법 개정안’을 6~7월 중 발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현행 지배구조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지주 회장과 은행·증권·보험사 대표의 ‘자회사 대표 겸직 제한 예외 규정’도 삭제하겠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이 법안을 ‘금융황제 금지법’이라고 칭하며 “황제도 자기 왕관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 올리는 경우는 드물다. 누군가 추대하고 이야기한 끝에 왕이 되는 것이 동서고금의 유례다. 그런데 한국의 금융지주 회장들은 왕관을 스스로 만들어 올리고 독단적 황제 경영을 펼친다”고 말했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당장 4대 금융지주(KB‧신한‧하나‧우리)의 지배 구조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4곳의 회장 모두 한 차례 이상 연임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서 이 같은 시도는 처음이 아니다. 오히려 최근엔 여야가 앞다퉈 금융지주 회장의 장기 집권에 제동을 걸고 나서고 있다. 김한정 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금융지주 수장의 임기를 6년으로 제한하는 내용의 법안 발의를 시도했고 올해 5월엔 금융지주 수장의 ‘셀프 연임’을 방지하는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 야당 소속인 강민국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해 국정 감사에서 사모펀드 사태 속에서도 금융지주 회장들이 연임하는 것을 두고 강도 높게 비판했는데 올해 3월 금융지주 대표가 계열사의 내부 통제 책임을 지는 내용의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반면 일부 금융권에선 민간 금융회사의 독립성이 침해될 수 있다고 반발한다. 금융지주는 ‘금융기관’이 아닌 ‘금융회사’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실력에 따라 장기간 재직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한다. 장기간 경영 목표를 추진하려면 연임이 불가피하다는 의견도 있다. 금융업계의 한 관계자는 “현 회장들은 눈에 보이는 성과를 바탕으로 연임됐다”면서 “우리금융을 제외하곤 금융지주 회사는 주주가 있는 민간 기업이다. 주주가 아닌데 민간 기업 수장의 임기를 제한하겠다는 것은 과도한 경영 개입으로, 자본주의 원리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호실적 바탕으로 연임 성공
오너 가문이 아닌 상황에서 10년 가까이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수성하는 것은 쉽지 않다. 5년만 넘어가도 장수 CEO 소리를 듣는다. 장기간 연임하며 금융지주를 이끈 회장들의 경영 성적표는 어떨까. 우선 현재 가장 오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수장은 김정태 하나금융그룹 회장이다. 김 회장은 2012년 취임한 이후 현재까지 하나금융그룹을 이끌고 있다. 임기 중 외환은행과 하나은행의 통합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며 매년 하나금융의 순이익 기록을 경신했다. 총자산은 284조원에서 475조원으로 1.7배 증가했고 주가는 3만5000원대에서 4만6000원대로 30% 정도 올랐다.

리딩 금융의 자리를 놓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윤종규 KB금융그룹 회장과 조용병 신한금융그룹 회장도 각 3회, 2회 연임하며 그룹을 이끌고 있다. 이들은 은행에 치우쳤던 사업 영토를 증권·손해보험·생명보험·벤처캐피털·자산운용 등 비(非)은행은 물론 자동차·부동산·통신 등 비금융 플랫폼으로 확장하고 있다. 양 그룹 모두 올해 1분기 총순이익에서 비은행 부문이 차지하는 비율은 50%에 달한다. 이들은 거침없이 인수·합병(M&A)을 진행하며 재임 기간 순이익 3조원 돌파를 일궜다.

우리금융도 손태승 회장이 2019년 첫 취임 후 2020년 연임에 성공했다. 손 회장은 2017년 우리은행장에 취임한 후 그동안 계속 흐지부지됐던 지주 체제 전환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장수 회장들이 우수한 경영 성적표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금융권에선 이들을 쫓아낼 명분이 없다고 얘기한다. 해외 금융그룹은 오히려 은행을 위기에서 구해 내고 탄탄한 성장세를 이어 가며 장수했던 CEO들이 수두룩하다. ‘월가의 황제’로 불리는 제이미 다이먼 JP모간체이스 CEO, ‘유럽 최고의 은행가’라는 별칭을 가진 보두앵 프로 BNP파리바 CEO 등은 모두 10년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금융그룹 회장 장기 집권 막는 대책 나오는 이유
‘거수기’ 사외이사에 내분까지
그렇다면 정치권 등에서 이들의 장기 집권에 제한을 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는 뭘까.

금융지주 회사에서 회장의 ‘장기 집권’ 관행은 시중은행들이 금융지주 체제로 전환된 2000년 이후 본격화됐다. 상법에 따르면 지주회사 회장의 임기는 3년을 초과하지 못한다. 하지만 연임 횟수와 관련해 특별한 제한 사항이 없어 금융지주 회장들의 장기 집권이 가능한 구조다. 통상 회장 선임은 이사회 의결로 결정되는데 정관을 통해 주주 총회에서 선임하도록 정할 수도 있다.

문제는 경영진을 견제해야 할 사외이사가 경영진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경우다. 윤종규 회장과 김정태 회장은 2018년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사추위)에 자신이 포함돼 논란을 빚었다. 금융지주사의 회장은 사외이사로 구성된 회장후보추천위원회(회추위)를 통해 뽑는데, 애초에 사외이사를 뽑는 위원회에 회장들이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HSBC와 씨티그룹 등 글로벌 금융회사가 CEO의 사추위 참여를 금지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논란 후 현재는 현직 회장을 사추위에서 제외한 상태다.

하지만 여전히 CEO의 장기 연임과 사외이사의 ‘거수기 역할’은 같은 카테고리로 묶여 나온다. 재임 기간 중 펀드 사태나 채용 비리 등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며 재판까지 받아도 이처럼 오랜 기간 연임이 가능했다는 것은 회장의 입맛에 맞는 사외이사들이 회추위 위원이 되고 그들이 다시 회장을 추천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는 지적이다. 또 금융회사가 경영진 입맛에 맞는 사외이사만 골라 연임시켜 이사회에 올라온 안건을 무리 없이 추진했다는 비판도 있다. 박홍배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위원장은 “지난해 전수 조사 결과를 보면 금융지주사 이사회가 대부분의 안건에 찬성하는 등 여전히 ‘거수기’ 역할에 머물러 있다”며 “회장 권력에 이사회가 포섭됐다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실제 최근 3~4년간 4대 지주 이사회에 올라온 안건 가운데 부결된 사례는 거의 없었다. 이 가운데 4대 금융지주는 올해 주주 총회에서 임기가 만료된 사외이사 26명 중 22명을 재선임했다. 디지털, 환경·사회·지배구조(ESG) 등 새로운 이슈가 등장하면서 금융업계의 혁신이 요구되고 있지만 새 사외이사를 선임한 곳은 신한금융과 하나금융뿐이었다.

장수 회장들은 재임 기간 중 파벌 문제가 불거져 나오기도 했다. 최대 주주인 오너가 회장 자리를 맡으며 그룹 전반을 진두지휘하는 것과 달리 ‘주인 없는 회사’를 이끄는 금융지주 회장들은 내분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연임을 원하는 회장이라면 ‘내 사람’을 계열사 요직에 앉힐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실제 금융권 첫 4연임 회장인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전 회장은 2010년 내부 지지 세력을 토대로 그룹 내 2인자였던 신상훈 신한지주 전 사장과 내분을 일으켜 불명예 퇴진했고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은 이건호 전 KB국민은행장과의 내분으로 동반 퇴진했다.

박용진 의원은 “금융지주는 규제 산업이면서 공적자금이 투입되는 등 공공성을 지니고 있다”며 “이러한 금융지주의 이사회를 사실상 장악해 거수기로 전락시켜 10년의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하고 수십억원의 연봉과 성과금을 챙겨 가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선 안 된다”고 말했다.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