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평가 ‘빵빵’ 국내에선 ‘글쎄~’

독일 대연정을 이끌며 세계 최고의 슈퍼우먼으로 불리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지난 11월22일로 취임 1주년을 맞았다.취임 초기 메르켈은 높은 인기를 누리며 비교적 순조롭게 연정을 이끌었지만 1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다소 엇갈린다.한마디로 말하면 외화내빈으로 표현할 수 있다. 대외적인 세계무대에서 메르켈의 성적표는 일단 합격점이다.8,000만명이 넘는 인구와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인 독일은 사실 오랫동안 유럽 한복판에 쪼그려 앉아서 힘을 쓰지 못하는 거인과도 같은 존재였다. 일각에서는 2차 세계대전 후 60여년 동안 독일은 쇠사슬에 묶인 거인에 불과했다고 비교하기도 한다. 물론 2000년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바뀌기 시작,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시절에도 독일은 발칸반도에서 조심스럽게 군사력을 사용하기 시작하는 등 종전의 얌전한 모습에서 조금씩 변신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슈뢰더 총리의 외교는 근본적으로 독일의 외교를 바꿔놓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대표적으로 이라크전을 반대함으로써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된 점 등이 꼽힌다.그런데 메르켈 총리가 집권한 후 독일의 외교노선은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메르켈은 슈뢰더 총리 시절 돈독한 관계를 지속하던 프랑스, 러시아와 거리를 유지하는 대신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나섰다.심지어 지난 10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했을 때는 아무 거리낌 없이 암살된 러시아의 유명 반체제 여기자 이야기를 꺼내 푸틴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정도였다.반면 메르켈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관계는 훌륭하게 개선해 나갔다. 물론 관타나모 수용소 문제 등에 대해서는 미국에 비난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메르켈의 대체적인 외교노선은 친미로 전향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메르켈은 특히 내년에 독일이 유럽연합(EU) 의장국이 되면 미국과 유럽 간 지식재산권이나 헤지펀드 규제 등의 분야에서 공동 산업표준이나 규제기준 등을 마련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할 방침이다.한 마디로 전통적인 우방이었던 프랑스·러시아와 거리를 두면서 유럽과 미대륙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또 지난 7월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간 유혈충돌이 발생했을 때 1,000여명의 병력을 파병해 국제문제에 적극 개입하는 모습도 보였다. 유엔 평화유지군 문제를 먼저 꺼내놓고 정작 파병에는 소극적이었던 프랑스와 대조적이다.독일은 이란 핵문제를 다루는 서방 6개국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독일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5개 상임이사국(P5)과 함께 외교무대의 주요 참가자(P5+1)로 자리를 굳혔다고 분석했다.메르켈 총리를 실무형 총리라기보다 외교형 총리에 가깝다고 보는 것도 바로 그의 이 같은 활발한 대외활동 때문이다. 특히 내년은 독일에는 ‘외교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연합(EU) 순번 의장국을 맡는 동시에 G8 정상회담을 개최하기 때문이다. 메르켈 총리는 이를 계기로 독일의 국제적 위상을 드높이는 것은 물론 EU 헌법을 재추진하면서 유럽통합 프로젝트를 한 단계 더 진전시킬 것으로 기대된다.이처럼 화려한 외교와 비교할 때 독일 내부에서 메르켈의 모습은 다소 차이가 난다.메르켈 총리의 지지율은 취임 후 줄곧 하향세를 보여왔다.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기민·기사당 연합과 사민당이 각각 29%의 지지율을 얻는 데 그쳐 집권 후 처음으로 30% 아래로 내려갔다. 출범 6개월이 지나면서 본격 떨어지기 시작한 지지율은 총선 당시(35.2%)의 지지율에 훨씬 못미치고 있다. 또 메르켈 총리의 업무수행에 대한 만족도가 지난 7월 비해 15%나 하락한 55%를 기록 중이다.여론조사기관 포르사가 최근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78%가 “정부는 국가의 가장 긴급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고 응답했다.국내에서 메르켈의 인기가 이처럼 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경제지표만을 놓고 본다면 메르켈 총리의 지난 1년간 성적표는 결코 나쁘다고 할 수 없다.경제성장률은 지난해 0.9%에서 올해 2.5%로 높아질 전망이다. 2.5%는 5년 만의 최고 수준이다. 이로 인해 1년 전 12%를 넘었던 실업률도 지난 9월 9.8%로 낮아졌다. 독일의 실업률이 10% 아래로 내려간 것은 4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500만명을 넘었던 실업자 수도 410만명으로 줄었다.남은 임기 3년 순탄치 않을 듯메르켈은 고령화사회의 문제와 연금부담을 동시에 손질했다. 퇴직연령을 65세에서 67세로 늦췄다. 의료보험제도도 고치고 출산장력책도 실시했다.그러면 이 같은 경제정책 실적에도 불구, 민심이 메르켈을 떠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우선은 메르켈이 개혁을 무리하게 밀어붙였다는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독일 정부는 지난 7월 건강보험료의 노사 분담금을 0.5%포인트 올리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가 거센 반발을 샀다. 그만큼 근로자들의 부담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재정건전화를 위해 내년 1월부터 부가가치세 세율을 16%에서 19%로 인상하는 방안도 국민들이 메르켈에게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이 같은 정책 때문에 객관적인 경제상황이 호전되고 있지만 국민들은 피부로 느끼는 체감경기는 나아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리더십에 대한 국민들의 큰 기대를 메르켈이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한 것도 인기하락의 한 요인이다.독일의 유력 신문인 <슈드 도이치 자이퉁>은 “강력한 리더십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이 일부 유권자들을 등돌리게 한 이유”라고 평했다. 신문은 이 같은 판단의 근거로 “과거 대연정에 박수를 보내던 세력이 가장 신랄하게 메르켈 총리를 비판하고 있다”며 “국민들은 대연정으로 인해 헤라클레스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탄생할 것으로 기대했던 것 같다”고 평했다.주간 <슈피겔> 역시 “국민들이 취임 초기 메르켈 총리에게 지나치게 큰 기대를 품었기 때문에 실망도 그만큼 큰 것”이라고 지적했다. 메르켈이 첫 여성총리가 됐을 때 많은 독일인들은 그가 독일판 마거릿 대처가 돼주기를 바랐다. 강인하고 거침없는 리더십으로 대연정을 이끌면서 미래 독일의 청사진을 제시하리라 기대했던 것이다.그러나 메르켈 총리는 우파 기민련과 중도좌파 사민당으로 구성된 대연립정부의 틈에 엉거주춤 끼인 채로 정부 운영의 장기 전략조차 확립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다. 단호한 지도자를 기대했던 독일인들에게는 대연정 내부에서 벌어지는 지루한 논쟁조차도 정부의 유약함을 드러내는 신호로 보인다고 슈피겔은 전했다.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듯이 국민이 바라던 큰 정치가 당장 이뤄지지 않자 실망감도 그만큼 크다는 분석이다.서로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여러 정당들이 한데 모인 대연정인 만큼 협상과 조율이 중요한데도 국민들은 이 같은 모습을 나약하다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또 대연정 내에서 갈등이 표출되면서 개혁적인 정책들이 상당부분 희석된 것도 리더십에 대한 불만을 초래하게 된 이유다.메르켈 총리는 연정이 계속되는 한 향후 3년간 더 독일 정부를 이끌게 된다.이 기간 중 실업수당의 축소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는 등 난항을 겪고 있는 노동부문 개혁을 이뤄내야 한다. 국민들의 불만을 다독이면서 장기적 국가번영을 위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고 있는 메르켈 총리가 과연 독일 역사상, 그리고 세계 정치사에서 어떤 총리로 기억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