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신탁 시장의 규모는 꾸준히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각종 규제와 업계 간 갈등에서 자유롭지 못한 실정이다. 신탁이 온전히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big story]신탁, 제도 개선 미흡… 종합자산관리 실리 살려야
국내 신탁 시장의 비상은 어디까지일까.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20년 3분기 기준 신탁 수탁고는 1020조8000억 원으로 1000조 원을 넘어섰다. ‘신탁법’ 개정으로 금융권에서 유언대용신탁 등 각종 금융상품이 출시되기 시작한 2011년(410조 원) 이후 10년 만에 2.5배나 몸집이 커진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급속한 외적 성장에 비해 실제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질적 성장은 미진하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돼왔다.

위탁자, 수탁자, 수익자의 관계·권리 등을 규정한 ‘신탁법’은 2011년 제정 50년 만에 전면 개정안이 통과됐지만 신탁업자를 별도로 규율하고 있는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이하 자본시장법)’이 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면서 충돌해왔다. 그 배경에는 신탁업을 둘러싼 은행과 증권 간 갈등의 골이 컸다. 은행은 자산관리 서비스 확대 차원에서 신탁 업무 확대를 위한 ‘신탁업법’ 제정을 적극 요구해왔다. 통상 은행이 증권사나 자산운용사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상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투자일임업을 하려면 신탁 업무 범위를 확대하는 ‘신탁업법’ 제정이 불가피해서다.

로펌과 의료 서비스 업체들도 유언대용신탁 등 신탁업을 하려면 ‘자본시장법’상 신탁업자로 인가받아야 하는데 자유로운 진입과 운용을 위해 인가제가 아닌 등록제로 전환하기 위해 ‘신탁업법’ 별도 제정을 추진해왔다. 이에 금융투자업계는 반기를 들었다. 증권업계는 은행이 거대한 영업망을 무기로 증권사의 업무 영역을 침범하려 한다며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론으로 맞불을 놨다. ‘자본시장법’으로부터 ‘신탁업법’을 분리하는 것 자체가 ‘자본시장법’을 해체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이에 정부는 2012년 개정된 ‘신탁법’을 반영한 자본시장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임기 만료로 폐기됐고, 2017년에도 ‘신탁업법’ 분리를 추진한 바 있다. 당시 금융위원회는 △수탁재산 범위 확대 △자기신탁·재신탁 운용 방식 허용 등 신탁제도 전면 개편안을 내놨지만 이해관계자들의 이견을 좁히지 못해 불발됐다. 또다시 3년 지난 지난해 2월 19일 금융위원회는 신탁제도 전면 개선 등의 내용을 담은 2020년 상세 업무 계획을 내놨다.

금융위는 “신탁제도는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는 자산관리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특정 금융상품을 판매하는 수단으로만 활용됐다”며 “국민의 노후 대비와 생활 안정을 위해 신탁제도가 ‘종합자산관리 제도’로서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유도하겠다는 취지다”고 말했다. 일부 규제도 완화했다. 특히 수탁 가능한 재산 범위의 확대가 두드러진다. 그간 금전, 부동산 등 ‘적극 재산’만 수탁이 가능했지만, 향후 부채 성격의 자산인 ‘소극 재산’과 담보권 등도 수탁이 가능하다.

부채를 포함한 예금, 대출, 부동산 등 재산 일체를 자산관리의 ‘틀’에 적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같은 해 12월에도 금융위는 제10차 규제입증위원회 회의를 통해 “신탁업자가 금전, 부동산 등 고객의 적극적 재산뿐 아니라 채무 등 소극적 재산도 도맡아 관리할 수 있는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며 해묵은 ‘신탁법’개정에 힘을 싣는 모양새였다. 현행 ‘자본시장법’은 수탁재산의 범위를 금전, 증권, 금전채권, 동산, 부동산, 전세권, 임차권, 무체재산권 등으로 제한하는데 이를 ‘신탁법’ 수준으로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탁이 우리 사회 만능 안전망으로 제대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더 적극적인 변혁이 필요하다는 것이 관련 업계의 중론이다. 전문가들은 우선 신탁 시장의 다양한 참여자의 유도, 신탁 전문 기관 및 시설의 도입 등 법 개정 외에도 포괄적인 제도적 개편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배정식 하나은행 트러스트센터장은 “급변하는 시장의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정책적 검토가 필요하다. 가령,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장기 자산관리 상품과 서비스의 확대를 위해서는 더 다양한 시장참여자가 참여해야 한다”며 “현재 영업신탁은 금융기관 중 신탁업 인가단위별로 허용되고 있다. 정책당국에서도 시장환경 조성을 위해 유언대용 및 치매 대비, 요양 등 폭넓은 참여자의 필요성에 대해 검토하고 있는데 더 적극적으로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신탁대리점 제도 도입을 위한 법 개정도 시급하다”며 “이미 일본은 신탁대리점 제도를 허용하고 있다. 하나의 신탁 회사(기존 금융기관 포함)가 모든 업무를 내부에서만 수행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신뢰성 있는 기관 또는 전문 단체들과의 협업 차원에서 신탁대리점 제도를 허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대형 로펌의 한 변호사도 “신탁의 핵심 기능은 신탁재산을 관리하는 것이다. 특히, 고령화 시대에 고령 부모의 재산을 부모가 충분히 사용하도록 보장하는 것은 노인의 존엄한 삶의 유지 면에서도 중요하다”며 “다양한 신탁업자들이 나와야 한다. 금융기관 외에도 법무법인, 세무법인, 부티크 신탁업자들이 나오도록 인가 요건을 완화하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특별수요신탁 등 가야 할 길 멀어 상사신탁 외에도 민사신탁이나 특별수요신탁 등 신탁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관심, 제도 개혁도 뒷받침돼야 한다. 상사신탁은 ‘자본시장법’에 따라 신탁업자가 관리하는 신탁을 말하고, 그 외 ‘신탁법’에 따라 신탁계약을 체결해 그 재산을 위탁자의 지시에 따라서만 처분하거나 신탁계약에 따라 관리(신탁재산의 성질을 변경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용·개량하는 행위를 하는 것)하는 신탁을 민사신탁이라고 한다.

‘신탁법’에 따라 수익증권을 발행하는 경우에는 ‘자본시장법’의 적용을 받기 때문에 민사신탁이라고 하지 않는다. 민사신탁을 영업으로 하지 않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다만, 민사신탁의 경우에도 신탁법 수탁자가 관리비나 보수를 받을 수는 있으나 보수를 받는 것을 영업으로 할 때에는 민사신탁이 아니라, 상사신탁으로서 ‘자본시장법’의 적용을 받는다. 이미 영미법 국가에서는 신탁의 기법은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잘 활용되고 있다. 가령 부부의 노력으로 부동산을 구입하면서 배우자 명의로 해두었더라도, 재산 취득과 유지에 다른 배우자의 기여가 있다면 그것에 해당되는 것을 신탁재산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혼 후 재산 분할을 하지 않더라도 공동의 재산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제철웅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외국과 달리 우리나라의 경우 신탁은 부동산명의신탁으로 인해 오명을 갖고 있다. 여전히 금융상품의 형태로만 신탁을 바라본다”며 “우리나라도 2012년 7월부터 전면 개정된 ‘신탁법’이 적용되고 있는데, 외국의 ‘신탁법’과 비교해볼 때 여전히 미흡한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제도 개선이나 법 개정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법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역량 있는 전문가가 부족한 점”이라며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전문가의 창의성을 억압하는 사회제도가 널리 퍼져 있다. 그래서 이런 사회제도의 개선이 매우 어렵다. ‘개인의 잘못’을 발견하고 비난하는 데 힘을 쏟기보다는 제도적 결함을 찾아 개선할 수 있는 창의적인 전문가가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big story]신탁, 제도 개선 미흡… 종합자산관리 실리 살려야
이 밖에도 신탁이 사회적 역할을 하기 위한 특별수요신탁의 비영리공익법인 설립이나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법률 개정도 시급한 과제다. ‘특별수요신탁(special needs trust)’이란 미국에서 유래된 것으로 가족 중에 특별한 필요를 가진 개인, 특히 장애인으로 하여금 안정된 삶을 영위하도록 하기 위해 활용되는 신탁이다. 소액의 신탁원본만이 있는 장애인 가족으로 하여금 신탁의 혜택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다. 위탁자(장애인 부모)의 사망, 파산 등과 관계없이 수익자인 장애인에게 안정적인 급부가 이루어지도록 특별수요신탁이 운영되고 있다. 미국과 싱가포르에서는 정부의 지원을 받는 비영리공익법인이 운영하고 있으며, 호주, 캐나다 등에서는 정부가 직접 운영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고령화 이슈까지 더해지면서 특별수요신탁은 고령자의 의사를 사후에도 관철시키고 고령자의 정신적 능력 결여에 대비한 고령자 권리 보호 방안이자 고령자의 생계 보장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도 강조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신탁의 적극적인 역할이 요청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제철웅 교수는 특별수요신탁의 필요성과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판단 능력이 떨어지는 장애인이나 고령자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당당히 살아가도록 지원하는 것은 본인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매우 소중한 가치를 지닙니다. 동시에 이들이 자신의 재산을 잘 활용해 생활하도록 지원하면 이들에게 지출될 수 있는 사회적 비용(공공부조 등)도 효과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특별수요신탁’을 제도로 도입하기 위해서는 장애인이나 고령자의 재산을 이전받아 이들의 일상생활, 치료, 요양 등의 목적으로 지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비영리공익법인을 설립해 그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률의 개정 또는 제정이 담보돼야 합니다.”

김수정 기자 hoho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