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섭 박사의 바로 이 작가 - 권주안

<봄>, 벽지와 캔버스에 유채 및 아크릴릭, 60.6×60.6cm, 2020년
<봄>, 벽지와 캔버스에 유채 및 아크릴릭, 60.6×60.6cm, 2020년
꿈은 구름을 닮아 언제나 같은 모습이 아니다. 구름은 볼 수 있어도 잡을 수는 없듯, 꿈도 느낄 수 있어도 현실은 아니다. 신기루와 같다. 어쩌면 현실의 무게는 꿈의 무게와 반비례인지도 모른다. 꿈은 삶의 상처를 보듬는 치유의 명약이기도 하다. 권주안은 꿈속에 현실을 넣는다. 위로와 치유가 목적이다.

권주안 작가의 그림에서 꿈을 만드는 주인공은 얼룩말이다. 얼룩말의 기본 습성을 이해하면 권 작가의 그림도 더 쉽고 편하게 다가온다. 우선 좋아하는 풀이 따로 있어서 다른 초식동물들과도 잘 어울린다. 위장의 명수로 알려졌다. 얼룩말의 흑백 줄무늬가 사람의 눈에는 잘 보이지만, 색깔을 구별하지 못하는 육식동물에겐 풀숲의 얼룩말을 알아채긴 힘들기 때문이다.

귀여운 줄무늬를 보며 얼룩말이 무척 여리고 온순하다는 오해가 많다. 반대로 아주 예민하다. 눈이 머리 옆에 있고, 청력과 후각이 발달해 경계심마저 강하다. 한 성질 한다. 성장하면서 워낙 난폭해지기 때문에 가축으로도 못 키운다. 가정에서 키우거나 승마용 얼룩말이 없는 이유다. 동물원에서 얼룩말을 돌보는 사육사가 가장 많이 다친다고 할 정도다.

그러고 보니 얼룩무늬가 참으로 유용하다. 자연의 수풀에서나 일상에서나 어쩌면 생존을 위한 위장술이 최적화된 동물인지도 모른다. 권 작가의 그림 속 얼룩말을 보면 왠지 모르게 자꾸 눈과 마음이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얼룩무늬가 부러워서 그렇다. 무던하게 어우러지면서도 적절한 거리는 유지하고, 내면의 성격도 적당히 숨겨가며 처세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룩말의 무늬만 빌릴 수만 있다면 말이다.

“작품 속에 설정해 놓은 가상의 풍경 속에서 얼룩말로 대치된 저 자신도 가상 여행을 합니다. 얼룩말은 본인이 바라는 문지기일 수도 있고, 안내자일 수도 있으며, 이상향으로 향하는 주체 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과 동일시된 얼룩말을 본인이 꿈꾸는 이상향의 입구에 세워두고, 얼룩말로 하여금 자신의 욕망이 성취되길 바라는 희망을 담았습니다. 그래서 얼룩말은 언제나 본인이 원하는 자리에서 이상향을 향해 나갈 준비가 돼 있어요.”

꿈이 현실이 되진 못한다. 그래도 꿈을 꿀 수는 있다. 비록 현실 속에서 헤어날 수는 없지만, 갖가지 행복의 조건들을 토핑(topping) 삼아 무수히 얹게 된다. 간혹 과욕인 줄 알면서도, 자신만의 유포리아(euphoria)를 만들기 위해서다. 이 다행감(多幸感)은 짧은 시간이지만, 매우 강한 행복감과 흥분을 선사한다. 신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행복한 상태에 빠지게 한다. 권주안의 그림처럼 적당한 꿈꾸기는 무해한 행복의 토핑이 될 수 있다.
 <방향을 잃다>, 벽지와 캔버스에 유채 및 아크릴릭, 97×162cm, 2021년
<방향을 잃다>, 벽지와 캔버스에 유채 및 아크릴릭, 97×162cm, 2021년
2021년 100호(97×162cm) 대작 <방향을 잃다>는 권 작가의 꿈과 생각이 함축된 종합본이다. 크게 보면 아주 색다른 구성의 공간을 얼룩말들이 걸어가고 있다. 먼저 흥미로운 점은 공간 구성이다. 마치 같은 시점에 여러 차원의 세계가 공존하는 걸 보여주는 듯하다. 평행선상에서 다른 세계들이 공존하는 다중 우주론을 그렸다거나 뒤틀린 4차원 우주를 표현한 것 같기도 하다.

작품의 중간 중간엔 둥근 구멍이 나 있다. 위아래, 좌우 사방에 뚫린 구멍은 얼핏 연못 같기도 하지만, 제각각의 하늘들이다. 그것을 좇다 보면 앨리스가 토끼 구멍을 통해 이상한 나라에 떨어지는 것처럼 기묘한 상상의 세계에 빠져든다. 역시 사방으로 푸르른 초원이 펼쳐져 있고, 얼룩말들이 그 위를 여여(如如)히 걸어가고 있다. 한 마리가 길을 내듯 저 앞으로 나섰는데, 그 한참 뒤로도 한 무리가 따른다.

그런데 뒤 무리는 네 마리 같지만, 다시 보니 한 마리 같기도 하다. 터벅터벅 무심히 걷다가 얼떨결에 방향을 잃은 정황으로도 보인다. 인생을 닮았다. 무수하게 반복되는 삶의 연속에서 간혹 넋을 잃듯, 삶의 의미에 대해 갈팡질팡 하기가 일쑤다. 최상의 파트너로 만난 부부마저 마찬가지다. 서로의 평행선을 따라 가다가도 엉겁결에 꼬이고 마는 게 인생이다. 안정되게 제 갈 길을 묵묵히 앞서 걷는 얼룩말이 제자리에서 가정을 지켜준 아내라면, 사회풍파를 견뎌내다가도 일순간 제 길마저 잃게 되는 중년의 가장일 수도 있다. 권 작가 그림의 참 매력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처럼 그의 작품은 얼룩말을 소재로 이상향(유토피아)을 그려내고 있다. 누구나 일상에서 꿈꿀 수 있는 거창하지 않은 욕망을 대변한다. 얼룩말은 작가 자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림을 보는 관람객이기도 하다. 너른 초원을 경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뛰어놀던 얼룩말이 힘없이 숙인 고개로 걷고 있다. 하지만 비운의 절망을 표현한 것은 아니다. 비록 방향을 잠시 잃고 어리둥절한 모습을 보여도, 굽이굽이 끝없는 계단이 기다려도 저 멀리 꿈꾸는 이상향으로 안내해줄 통로는 항상 마련해두었기 때문이다.

“현실과 유토피아의 중계 공간을 표현하고 있어요. 각각의 작품은 제목에 보이는 것처럼 서로 다른 내용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지만, 모두 이상향을 향한 욕망을 담고 있습니다. 현실에서 겪는 여러 어렵고 힘든 상황으로부터 탈출하고자 도피처를 찾게 됐고, 그것이 작품 속에 다양한 구조물들을 만들게 했어요. 작품마다 각기 다른 형태로 표현된 구조물들은 본인이 꿈꾸는 이상향으로 통하는 출입구가 돼줍니다. 즉, 현실과 이상향의 두 공간을 연결하는 중간계인 거죠.”

권 작가의 ‘얼룩말 시리즈’만큼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담아낸 예도 드물 것이다. 작품들은 하나같이 자전적 삶에 대한 회고이며, 스스로 위로하는 자가치유의 방편이다. 한 사람의 아내이며, 며느리이고, 엄마로서 살아냈던 20여 년에 대한 힘겨운 방백(傍白)이나 다름없다. 얼룩말을 내세워 자신의 이야기를 우리 관람객에게 쉼 없이 건네고 있는 것이다. 그런 카타르시스 과정을 통해 심적인 외상을 조금씩 치유해나가고 있음을 목격하는 셈이다.

또 하나 자기 마음의 흥미로운 표현법은 그림의 제작 방식이다. 화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감 층의 밑면에 다양한 무늬나 패턴의 질감이 느껴질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벽지다. 공간 구성미에 따라 여러 문양과 질감의 벽지를 잘라 붙이고 물감을 칠해 나간다. 이러한 과정 역시 인생미학을 담았다. 벽지는 밋밋하거나 더러운 벽면을 효과적으로 가리는 장식효과를 발휘한다. 이 벽지를 자전적 에피소드를 담은 그림의 바탕에 붙인다는 행위가 곧 '벽지의 장식효과'처럼 인생의 상흔을 어느 정도는 가려줄 것이란 위안 삼기일 수도 있겠다.
얼룩말, 그림에서 꿈을 만들다
권 작가는 그동안의 연작인 ‘유토피아로 가는 여정’ 이후의 변화를 꿈꾸고 있다. 전반적인 표현 형식은 연장선에 있되 서커스와 마술처럼 보다 극적인 소재를 알레고리적으로 표현하는 작품을 구상 중이라고 한다. 지난 이야기의 주인공인 얼룩말이 자연에서 차용한 은유적 대상이었다면, 앞으로의 표현들은 자신의 생각을 보다 적극적으로 표면에 내세우지 않을까 기대된다. 작품의 전시 가격은 30호(91×72.7cm) 450만 원, 50호(116.7×91cm) 750만 원, 100호(162×130.3cm) 1300만 원 정도다.

아티스트 권주안은

1971년생. 권주안 작가는 숙명여대 미술대학 학부와 석사과정에서 회화를 전공했고, 같은 대학원 조형예술학과 미술학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그동안 2020 연우갤러리(서울), 2019 유나이티드갤러리(서울, 유나이티드 문화재단 지원), 2019 정부서울청사(서울, 정부서울청사 지원), 2018 오산시립미술관 등 아트페어 부스전을 포함해 31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또한 2018 쇼 콘(SHOW CON) 작가공모 작가 선정(오산시립미술관), 2016 말박물관 작가공모 작가 선정(한국마사회), 2009 한전아트센터 KEPO갤러리 작가공모 작가 선정(한국전력), 2007 GS타워 더스트릿갤러리 작가공모 작가 선정(GS타워), 2007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한국미술협회), 2004 동아미술제 입상(동아일보사)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성남아트센터, 한전아트센터, GS타워, 유나이티드문화재단, 아랍에미리트 한국대사관 등 여러 국내외 기관과 기업 및 개인 컬렉터 등이 소장하고 있다. 고려대, 대진대, 숙명여대 등의 강사를 역임했다.

필자소개 | 미술평론가 김윤섭은 명지대 대학원에서 미술사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2019 안양국제공공예술프로젝트(APAP) 예술감독을 역임했다. 현재는 숙명여자대학교 겸임교수, 국립현대미술관 작품가격 평가위원, 정부미술은행 운영위원, 인천국제공항 문화예술자문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프로젝트 아트디렉터, 2021 경주국제레지던시아트페스타 전시감독, 아이프AIF 아트매니지먼트 대표,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 서울시 미래유산보존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