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이지만 '자본'으로 회계 처리돼 인기
사모 발행 시 공시 의무도 없어

금융 감독 사각지대에 방치된 '영구채'
자금난에 허덕이는 기업들의 신규 자금 조달 수단으로 각광받았던 영구채(신종자본증권)가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영구채에 붙은 독특한 조항 때문이다. 게다가 많은 발행 기업들이 공시조차 하지 않아 향후 보다 철저한 금융 당국의 감독이 요구된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2015년 국내 상장 기업들 중 사모로 영구채를 발행한 기업은 만도·신세계건설·SK E&S·현대오일뱅크·풀무원식품 등 5곳으로, 총 발행 규모는 8850억원에 달한다. 2014년에 사모로 영구채를 발행한 기업은 현대중공업뿐이었다. 발행 규모는 4000억원이다. 같은 해 SK텔레콤도 1000억원어치의 영구채를 발행했지만 공모로 진행했다.

지난해 사모 발행 급증 ‘적신호’

사모로 영구채를 발행한 기업들 중 금융감독원에 공시한 기업은 신세계건설 뿐이고 나머지 기업들은 영구채 발행 사실을 공시하지 않았다. 공시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영구채가 금융 감독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금감원은 현재 50인 이상의 공모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채권을 발행할 때에 한해 공시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사모로 영구채를 발행한 기업들은 발행 금액 규모와 상관없이 공시할 의무가 없다. 자율 공시인 만큼 해당 기업의 의지에 달려 있을 뿐이다.

서규영 금감원 공시제도실 팀장은 “영구채 발행은 공모냐 아니냐에 따라 공시 여부가 달라진다”면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공모라면 공시해야 하지만 특정 기관 및 다수 투자자들에게 인수해 주기로 했다면 공시할 의무가 없다”고 말했다.

대규모의 기업 자금 거래는 일반 투자자들에게도 공시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일각의 시선에 대해 서 팀장은 “그런 시각이 있을 수도 있지만 각각의 생각이 다 달라 한계가 있다”며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기준을 제도로 제시하고 시장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현재 제시된 경계의 기준은 공모와 사모로 구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희준 고려대 법학연구원 전임연구원은 ‘영구채 발행에 관한 법적 연구’라는 논문에서 “영구채는 만기가 영구적이기 때문에 투자자 및 채권자 보호에도 소홀하지 않아야 한다”며 “특히 투자자는 회사 채권자일 뿐만 아니라 회사 재무제표상 자기자본을 구성하는 주주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두터운 보호의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영구채는 영구히 이자만을 지급하는 채권으로, 채무자가 원금 상환에 대한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채권을 말한다. 만기가 없다고는 하지만 통상적으로 30~40년 만기를 지닌다. 이처럼 무늬는 채권인데, 속은 자본의 성격을 띤다.

2013년 국제회계기준위원회(IASB)에 따라 영구채는 발행액 전체를 자본으로 회계 처리하고 있다. 기업으로선 부채비율을 늘리지 않고도 외부로부터 자금 수혈을 받을 수 있는 셈이다. 유상증자보다 절차가 까다롭지 않아 자본을 쉽게 늘릴 수 있어 자기자본비율도 높일 수 있는 등 재무구조 개선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이 밖에 투자자는 의결권을 지니지 않아 기존 주주의 지분을 희석하지 않는다는 점, 사채 발행의 법적 형식을 취하지만 원금 상환과 이자 지급을 연기할 수 있다는 점, 법인세 절감 효과까지 지니고 있어 재무 상태가 좋지 않은 기업으로선 충분히 구미가 당길 만하다.

하지만 조기 상환의 부담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단점으로 꼽힌다. 현재 국내에서 발행되는 대부분의 영구채는 스텝업(Step-up) 조항을 갖고 있다. ‘독’이 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 조항이다.

윤정선 국민대 경영학과 교수는 “국내 기업이 발행한 영구채 중 상당수가 스텝업 조항과 풋옵션을 포함하고 있다”며 “부채비율과 별개로 영구채가 유발하는 이자비용과 함께 발행 조건에 포함된 다양한 단서 조항들에 대한 보다 철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윤 교수가 언급한 단서 조항은 영구채가 지니고 있는 특유의 콜옵션(살 권리)과 풋옵션(팔 권리)을 말한다. 옵션은 말 그대로 권리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영구채를 사들인 투자자는 기업에 채권 중도 상환을 요구할 수 있는 선택권을 지니고 있다. 옵션을 행사하지 않으면 스텝업 조항에 따라 이자율이 한 단계 상승하는 것이다.

스텝업 조항으로 이자 부담 ‘눈덩이’

2017년 10월 중도 상환 기일이 도래하는 두산인프라코어가 직면한 문제가 바로 스텝업이다. 발행 당시 금리는 연 3.25%였다. 하지만 콜옵션 행사 여부에 따라 금리가 5% 포인트 더 붙게 되고 또다시 2년 후에도 응하지 않게 되면 추가로 2% 포인트가 늘어나 이자 부담은 갈수록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두산인프라코어 관계자는 “자본 인정에 따른 부채비율 개선과 당시 회사채보다 낮은 금리로 발행 가능하다는 점, 스텝업에 따른 상환 여부를 회사가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반 해외 채권보다 유리했기 때문에 회사는 영구채 발행을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최근의 영구채에 대한 우려는 스텝업 이자가 5% 포인트, 2% 포인트씩 추가로 붙기 때문에 과도한 이자를 낼 수 있다는 점 때문”이라며 “5년 후 5% 포인트의 스텝업은 두산인프라코어가 신용 보강 없이 영구채를 발행했을 때 예상 금리가 8~9% 수준이었기 때문에 이를 고려해 결정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당시 영구채를 발행한 글로벌 사례의 발행 금리가 9~11% 수준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2012년 영구채 발행 금리 3.25%는 낮은 금리의 성공적인 발행이었다고 그는 강조했다.

김현기 기자 henry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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