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졸·대졸 월급 같게"…학벌 공식 깬 기업의 '파격' [도쿄나우]
“AI 시대에도 학벌과 연공서열이 보상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연공서열과 종신고용의 상징이던 일본에서 기업 보상의 공식이 흔들리고 있다. 학력과 근속연수에 따라 처우를 달리하던 관행을 깨는 기업들이 등장하면서다. 공장자동화(FA) 관련 기기 업체 미스미그룹 본사는 고졸과 대졸의 초임을 통일했고, 미쓰이스미토모신탁은행은 퇴직급여에서 근속연수에 따른 가산을 없애기로 했다. 인공지능(AI) 확산과 전문인력 확보 경쟁 속에 채용부터 퇴직까지 실제 역량과 직책을 중시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고졸·대졸 초임 통일…“AI 시대엔 대응력이 중요”

3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미스미그룹 본사는 내달부터 고졸과 대졸, 이미 학교를 졸업한 청년 인재를 동일한 전형으로 연중 채용하는 제도를 도입한다. 초임은 학력과 관계없이 월 30만3000엔(약 260만원)으로 통일했다. 수당과 복리후생도 동일하게 적용한다.

기존에 대학생과 고등전문학교 학생을 정기적으로 선발하던 신규 졸업자 일괄 채용은 폐지했다. 대신 고등학생부터 대학생, 사회생활 경력 약 3년 차까지 지원할 수 있는 ‘청년 잠재력 채용 코스’를 신설했다. 채용이 확정된 학생은 2027년 4월 이후 연 네 차례 마련된 입사 시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채용 기준도 바뀐다. AI에 관한 지식 자체보다 과제를 찾아내고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을 중시한다. 선발 과정에서는 과거 경험과 다른 사람에게 배운 점, 주변 사람들의 참여를 어떻게 이끌어냈는지 등을 평가한다.

가토 쓰카사 미스미 최고인사책임자(CHRO)는 “젊은 직원들이 맡던 자료 작성과 정보 수집의 대부분을 AI가 할 수 있게 되면서 요구되는 업무가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도요타자동차에서 약 30년간 국내외 인사업무를 담당했던 그는 “고졸·고등전문학교 졸업자 가운데 도저히 따라갈 수 없겠다고 느낀 상사와 동료가 많았다”며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자세나 과제를 찾아내는 능력은 학력과 관계없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여전히 학력에 따른 임금 격차가 크다.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2025년 신규 졸업자의 평균 임금은 대졸이 월 26만2300엔, 고졸은 20만7300엔으로 대졸이 약 26% 높았다. 노동정책연구·연수기구가 추산한 고졸과 대졸의 생애임금 차이는 남성이 4720만엔(약 4억2480만원), 여성은 5200만엔(약 4억6800만원)에 달한다.

퇴직금에서도 근속 가산 폐지…경력 인재 불이익 줄인다

"고졸·대졸 월급 같게"…학벌 공식 깬 기업의 '파격' [도쿄나우]
입사 단계에서 학력의 비중을 낮추는 움직임과 함께 퇴직 보상에서 근속연수의 비중을 줄이는 변화도 나타나고 있다.

미쓰이스미토모신탁은행은 지난달 퇴직금·기업연금 체계 개편에 착수했으며, 2026회계연도 안에 근속연수에 따른 가산을 폐지하기로 했다. 대상은 촉탁직을 제외한 정규직 약 1만 명이다.

기존에는 능력과 직책, 근속연수 등 세 가지 요소로 지급액을 정했다. 개편 후에는 퇴직일시금과 확정급여형 기업연금(DB)에 능력과 직책만 반영한다. 확정기여형 연금(DC)의 회사 부담금도 능력을 기준으로 정한다.

승진하지 못한 직원은 기존 제도보다 지급액이 줄어드는 반면, 20% 이상 늘어나는 직원도 나올 전망이다. 금리 상승분도 지급액에 추가 반영한다.

앞으로 입사하는 직원에게 미치는 영향이 특히 크다. 신입으로 입사해 오래 근무했더라도 경력 입사자보다 직책이 낮으면 퇴직급여가 적을 수 있다. 반대로 경력 입사자는 근속기간이 짧다는 이유로 받던 불이익이 줄어든다. 자산운용과 디지털 분야의 전문성이 중요해지면서 외부 인재를 확보하기 위한 보상체계를 마련하려는 취지다.

일본 대기업의 퇴직급여는 신입사원 일괄 채용과 종신고용을 전제로 설계됐다. 젊을 때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을 받는 대신 오래 근무하면 경력 후반의 임금과 퇴직급여로 보상받는 구조다.

일본 중앙노동위원회의 2025년 조사에 따르면 대졸 종합직의 퇴직금은 근속 15년 기준 601만엔(약 5409만원)이었다. 16년 차 이후에는 대체로 연평균 90만엔씩 늘어 근속 30년에는 2009만엔(약 1억8081만원)에 달했다. 장기근속을 유도하는 장치였지만, 회사를 옮기면 근속에 따른 혜택을 이어가기 어려워 인력 이동을 가로막는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출발선 장벽 낮추고, 입사 후 성과 차등은 확대

퇴직급여를 재직 중 보수로 돌리는 기업도 등장하고 있다. 오지홀딩스는 올해 봄 이후 입사자의 퇴직금을 폐지하고 해당 재원으로 급여를 인상했다. 젊은 인재가 당장 받는 보수를 높여 채용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목적이다. 마루베니도 퇴직급여 일부를 상여금과 함께 미리 지급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퇴직금과 기업연금 등 퇴직급여 제도를 운영하는 기업 비율은 2023년 75%로, 5년 전보다 6%포인트 낮아졌다.

이 같은 변화는 학력이나 장기근속보다 현재의 역량과 기여를 보상에 반영하려는 흐름으로 이어진다. 다만 출발선의 장벽이 낮아지는 만큼 입사 이후 평가에 따른 보상 격차는 일찍 벌어질 수 있다.

미스미는 기존에 성장이나 성과와 관계없이 입사 후 2년간 일률적으로 적용하던 처우도 바꾸기로 했다. 2026년 봄 입사자부터는 1년 차 평가를 바탕으로 급여를 차등화한다. 학력에 따른 초임 차이는 없애되 입사 후 성과에 따른 차이는 더 빨리 반영하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대학 밖에서도 지식이나 기술을 익힐 기회가 늘어나고 있다”며 AI 확산으로 “학력만으로는 충분히 측정할 수 없는 능력이나 잠재력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도쿄=최만수 특파원 beb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