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TV+ 8부작 ‘슈거’
전설의 탐정 필립 말로우의 현대판 패션
어떤 일이 있어도 그는 화이트 칼라 와이셔츠에 단색 넥타이를 하고 커프스까지 한다. 그 옛날 전설의 탐정 필립 말로우(레이먼드 챈들러가 창조한 캐릭터)나 샘 스페이드(대쉴 해밋이 창조한 탐정)가 늘 중절모에 정장 차림으로 다녔던 것의 현대판 패션인 셈이다.
탐정 슈거는 멜라니의 전 남편이자 영화 제작자인 버니 시걸(데니스 부치카리스)이 영화배우 레이첼 케이(나탈리 알린 린드)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올리비아(시드니 챈들러)를 찾고 있다.
올리비아는 실종됐다. 아버지인 버니는 그녀가 어디선가 약에 취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할아버지 조너던 시걸(제임스 크롬웰)의 생각은 다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조너던 시걸은 할리우드의 전설적 제작자이며 그의 아들 버니는 그보다 못한 2류 제작자(그의 사무실에는 액션영화 ‘익스펜더블’ 포스터가 보인다)이고 또 그의 아들의 아들, 곧 손자인 데이비드는 한때 데이비라는 극 중 이름으로 인기를 얻었던 아역배우 출신의 망나니 데이비드(네이트 코드리)이다.
조너던 시걸이 존 슈거를 만나는 모습은 지금까지 할리우드가 탐정 영화나 그 비슷한 장르물에서 사용해 왔던 수많은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탐정물 중 유명한 영화들 대부분이 누군가를 찾아 달라는 얘기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단순해 보이던 그 실종사건은 곧 어마어마한 사건, 폭행과 살인으로 이어진다. 더욱 심각한 것은 대체로 그 모든 음모가 한 집안의 비극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보다 더 가관인 것은 그 집안의 일원이 범행의 배후이거나 최소한 공모자일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로버트 벤튼이라는 희대의 시나리오 작가 출신(‘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감독이 만든 ‘트와이라잇’(1998)도 퇴락한 사립 탐정 해리(폴 뉴먼)가 은막의 스타였던 잭과 캐서린 부부(진 해크만, 수잔 서랜든)의 딸(리즈 위더스푼)을 찾는다는 얘기이다.
스티그 라르손의 원작을 데이빗 핀처가 만든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2012)에서 탐사보도 전문기자 미카엘(다니엘 크레이그)은 재벌 헨리크(크리스토퍼 플러머)로부터 오래전 실종된 질손녀(조카 손녀, 형의 손녀)를 찾아 달라는 사건을 의뢰 받았다가 실로 끔찍한 악의 실체를 밝혀낸다.
이 드라마의 뒷부분은 혀를 내두르게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어쩌면 전통과 모던이 만나는 극적인 지점이라는 생각까지 갖게 만든다.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하게 됐고, 또 어떻게 이런 상상의 이야기를 허용하게 됐을까. 할리우드가 지닌 무한대의 창의성, 그걸 보장하는 제작 풍토가 새삼 놀라울 지경이다.
이번 드라마의 쇼 러너 감독(전반부 회차만 연출하고 나머지를 총괄 기획하는 프로듀서)인 페르난도 메이렐레스(‘눈 먼 자들의 도시’ ‘콘스탄틴 가드너’ 등)의 메시지는 분명해 보인다. 옛날, 그러니까 사립 탐정 영화가 쏟아져 나왔던 1940년대 필름 누아르 시절과 달리 인간(탐정)이 인간(의뢰인)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는 시대에서 궁극의 인간 구원의 문제는 결국 발상의 전환을 이룰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의 결론은 그래서 충격적이다.
이건 참으로 의미심장한데 옛날 영화 ‘빅 히트’에서 글렌 포드가 맡은 경찰 데이브는 자신이 수사하게 된 한 여인의 살인사건을 놓고 경찰서장과 국장으로부터 제지받는다. ‘슈거’에서도 주인공 존 슈거는 올리비아를 더 이상 찾아다니지 말라는 압력을 사방에서 받는다. 고전영화의 이야기와 댓구를 이룬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푸티지를 사용한 셈이다.
[애플TV+ '슈거' 공식 예고편]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