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진·김성훈 안무···무용예술로 재해석

지난 2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개막한 서울시무용단의 신작 ’엘리자베스 기덕‘은 스코틀랜드 태생인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 이야기다. 공연장에 들어서면 거대한 두루마리 형상의 무대 세트 배경에 적힌 키스의 영문 이름이 눈에 띈다. 공연이 끝날 즈음엔 이 이름 위로 ’기덕(奇㥁)‘이란 글자가 한자로 덧입혀져 있다.
이 작품은 키스가 1919년 봄, 식민지 조선에 처음 방문했을 때부터 1934년 경성에서 연 두 번째 전시회 때 ’기덕‘이란 한국식 이름으로 낙관을 변경했을 무렵까지 다룬다. 이 시기에 키스가 그린 한국 풍속화들과 친언니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바탕으로 그가 만났거나 관찰한 사람들과 사건들, 풍경들을 새롭게 구성했다. 이를 통해 키스가 한국에 대해 느낀 연민의 감정과 사랑, 그의 시선으로 바라본 한국인들의 모습을 영상과 음악, 무용수들의 몸짓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무대예술로 표현했다.

‘정월 초하루 나들이’ ‘신부’ ‘과부’ 등 키스가 그린 그림 속 인물들이 무대에서 되살아난다. 일본군에 잡혀간 신랑 없이 신혼 첫날밤을 홀로 지새우는 신부. 그림 속에서는 마냥 앉아 기다리는 정적인 모습이지만 무대에서는 절제된 전통의 몸짓으로 외로움을 달래는 듯한 독무를 추기도 한다.
키스가 금강산에 유람하러 가서 만난 과부. 독립운동하던 남편은 죽었고, 아들도 일본군에 끌려간 데다, 자신도 고문당하고 풀려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다. 타고난 기품으로 평온하게 앉아 있는 그림 속 자태처럼 무대에서도 의연하고 꿋꿋하게 삶의 고난에 맞서는 독무를 보여준다.

공연의 마지막 장면이자 하이라이트인 ‘만세 군무’가 대표적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많은 인원인 17명의 무용수가 함께 추는 이 춤은 내용적으로는 시대상과 민족의 열망을 담아내는 듯하면서도, 정형화되지 않은 현대적인 동작으로 키스의 마음도 대변한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