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커를 중심으로 그 기원을 창의적으로 각색한 이 영화는 우리의 시선을 조금 바꿔보라고 종용하는 듯하다. 그저 자신의 불운과 가난에 기꺼이 수동적으로 응수하며 살아가던 조커가 숨겨져 있던 자신의 유년시절 판도라의 상자를 열면서 악은 탄생한다. 망상장애의 환상 속에 은폐돼 있던 진실을 끝내 찾아내고 응시한 조커는 전혀 다른 조커로 재탄생하며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사회, 종교, 정치 등 민감한 주제들이 헐리우드라는 범대중적 미디어 플랫폼 위에 얹어졌을 때 여러 소재는 영화적 장치로 재현되며 상징들은 불친절하게 주제를 은유한다. 동일한 장소지만 수십 개의 계단을 오르던 아서가 조커 분장을 하고 춤을 추며 내려오는 장면에서 아서는 더 이상 아서가 아니다. 모던 타임즈의 찰리 채플린은 마치 조커와 같은 자본주의 광대처럼 비친다.

선과 악, 보수와 진보, 옳고 그름은 없다. 이 영화는 단지 성공한 자와 실패한 자, 기득권과 비기득권자만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화이트 룸에 갇혀버린 조커의 세계관 속으로 관람객의 시선을 깊고 무겁게 몰아간다. 태양이 결코 빛나지 않는 곳에 내던져진 인생은 그 자체가 코미디였다는 아이러니 앞에서 조커는 웃었고 귀밑까지 찢어질 듯한 입으로 또 웃을 뿐이다.
조커라는 인물이 ‘악의 탄생’이라는 부제 아래 새로운 캐릭터로 승화할 수 있었던 데엔 음악이 있다. 우스꽝스럽게 계단에서 댄스를 춰도 조커는 과거의 조커가 아니다. 배경으로 깔리는 첼로는 이 영화의 분위기를 대변한다. 바로 힐더 구드나도티르 음악 감독은 조커의 심리 상태를 음악으로 치환하듯 소리와 연주 모두 비범하게 직조해냈다. 힐더 루드나도티르는 누구인가? 그녀와 마찬가지로 아이슬란드 출신 영화 음악가 요한 요한슨과 함께 ‘프리즈너스’, ‘시카리오’ 그리고 ‘컨택트’까지 때론 음울하며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감각적인 앰비언트 또는 첼로로 변주해낸 바 있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테마 곡에 가사를 붙여 만든 지미 듀란트의 ‘Smile’은 의미심장하다. 엘라 윌콕스의 시 ‘고독’의 싯구가 떠오른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게 될 것이다’ 이 외에도 게스 후의 ‘Laughing’, 프랭크 시나트라의 ‘Send in the clowns’ 등 적재적소에 어울리는 팝, 록, 소울 음악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영화의 핵심을 가르는 음악은 내게 있어 크림의 ‘White room’이다. 체포되어 경찰차를 타고 가는 중에 무심코, 그러나 강력하게 흘러나오는 싸이키델릭 록 ‘White room’은 에릭 클랩튼이 들었다며 탄성을 질렀을지도 모를 정도로 이 영화의 백미다.

조커는 배트맨 시리즈에 등장한 그 조커인가? 표면적으로 조커의 탈을 쓰고 있으나 조커는 그저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호아킨 피닉스의 신들린 듯한 연기는 조커을 더 이상 조커로 보기 어렵게 자꾸만 관객의 시야를 흐리면서 동시에 확장시킨다. DC 코믹스의 캐릭터에서 얻은 인물과 배경을 현대사회 어두운 면에 빗대어 변주한, 진지하고 엄숙한 주제의 영화 [조커]. 그러나 이 영화가 상업 영화의 중심, 헐리우드 플랫폼에서 제작되고 전 세계 메이저 멀티플렉스에서 유통되는 아이니러니는 일면 통쾌하기까지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