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에선 대개 무대 뒤에 출연자들을 위한 카페테리아가 운영된다. 여기서 맥주 등 주류와 식사거리를 판매하기에 연주 후 출연자들이 무대 뒤에서 바로 잔을 부딪힐 수 있다. (한국의 공연장에는 아쉽게도 무대 뒤에 출연자들을 위한 이런 카페테리아가 없다) 어찌되었든 식사를 하지 않고 연주를 한 후 고요한 대기실로 돌아와 맥주를 마시는 순간은 힐링 그 자체다. 연주 뒤에도 일부 아드레날린은 남아 있지만, 갑자기 밀려드는 피로와 갈증, 허기로 지친 몸과 마음을 맥주가 치유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아뿔사! 맥주가 없었다. 물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갈증과 아드레날린을 식혀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순간, 나의 대기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았는지 오랜 친구가 나타나 말한다. "어이~ 마에스트로, 냉장고에 맥주 식혀놨다. 수고했다. 친구가 우리 오케스트라 와서 함께 하니 좋네.” 조금 과장해서 세상에서 가장 맛있던 맥주였고, 눈물까지 핑도는 맥주였다. 모든 것이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치유. 실로 맥주는 수천년 간 인류와 함께 했다. 수천년 전 맥주는 술이라기보다 자연적으로 발효된 곡물, 묽은 죽같은 형태였다. 사람들 식사나 신들을 위한 제사음식으로 쓰였다. 그렇게 오랜시간이 지나 유럽의 중세시기에 들어서야 술과 비슷한 음료로 사람들이 마시기 시작했다.

성 힐데가르트는 여성의 사회활동이 거의 불가능했던 시대에 전대미문의 여성의 삶을 살았다. 그는 수녀원 두 곳의 원장을 맡아 수녀원을 이끌었고, 작곡가·시인·자연과학자·의사·약초학자·작가·언어학자·예언가 등으로 방대한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천년 전에 작곡된 그의 성가곡들은 온전하게 악보로 남아 후대의 음악에 영향을 미치고 현재까지 불려진다. 그의 작품 중 '오르도 비르투툼'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극음악으로, 오페라의 시초로 여겨진다.
그는 또 약초들을 연구하며 먼 미래에 호프가 맥주에 중요하게 쓰일 것을 알고 있었다. 성 힐데가르트는 호프가 가진 방부효과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호프로 만든 맥주가 곡물의 힘과 그 수분으로 사람을 살찌우게 하고 얼굴에 아름다운 색을 준다고 알고 있었다. 나아가 우울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영혼의 힘이 재생되는 것을 촉진시킨다고 했다.
물론 모든 것은 과하면 안 된다. 1000년 전 성 힐데가르트의 맥주는 현재의 맥주보다 알코올 도수가 현저히 낮았었던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연주 후 맥주 한 잔에서 얻는 치유의 순간이면 족하다. 성 힐데가르트는 자신의 작품 'Causae et Curae'에서 외쳤다. "Cerevisiam bibat!"(맥주를 마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