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사용설명서' 이원석 감독 신작…이선균 연기 변신 눈기
B급 감성 더한 현대판 '인형의 집'…영화 '킬링 로맨스'
"이제 둘 중 하나야. 조나단이 죽든 내가 죽든."
한때 전 국민을 사로잡았던 톱스타 황여래(이하늬 분)는 데뷔 후 대중이 원하는 모습에 맞춰 살아왔다.

형편없는 연기 실력으로 조롱거리가 된 후에야 처음으로 휴가를 떠날 자유를 얻지만, 그곳에서 만난 조나단 나(이선균)와 사랑에 빠지며 또다시 타인의 기준에 맞춰 사는 인형 신세가 된다.

체중은 49㎏,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있어야 비로소 '완성형'이라 말하는 조나단의 구속과 집착에 이혼도 요구해보지만 돌아오는 건 폭력과 협박뿐이다.

영화 '킬링 로맨스'는 은퇴한 톱스타 여래가 남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벌이는 사투를 그린 코미디다.

남편이 원하는 모습에 맞춰 살아가면서 진정한 자신을 잃어버린 여래의 모습은 희곡 '인형의 집' 속 노라를 연상시킨다.

가정폭력과 가스라이팅이란 소재와 코미디 장르. 이원석 감독은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두 가지를 동화책을 읽어주는 듯한 액자식 구성, 한 편의 뮤지컬 같은 시퀀스 등 다양한 장치를 활용해 융합하는 데 성공했다.

B급 감성 더한 현대판 '인형의 집'…영화 '킬링 로맨스'
'킬링 로맨스'는 신선한 유머 코드, 주제 의식의 변화, 세련된 미장센이 더해진 '이원석 표 동화'다.

이 감독은 과장된 설정과 기발한 연출로 사랑받은 '남자사용설명서'(2012)의 장점을 그대로 가져가면서도 전작을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진화를 보여준다.

'킬링 로맨스'의 가장 큰 웃음 포인트는 노래다.

조나단에게서 도망칠 방법을 찾지 못한 여래는 살인을 계획하는데, 암살 방법은 '휙확훅'이나 '푹쉭확쿵' 같은 의성어로 표현된다.

다소 엉뚱한 이 의성어들의 반복은 그 자체만으로도 코믹하지만 나아가 일종의 리듬을 만들어내며 웃음을 준다.

또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H.O.T.의 '행복', 비의 '레이니즘' 등 음악은 상황에 따라 변주되며 유머 코드로 활용된다.

B급 감성 더한 현대판 '인형의 집'…영화 '킬링 로맨스'
무엇보다 이 작품이 '남자사용설명서'의 진화된 버전임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작품의 주제 의식과 미장센이다.

'남자사용설명서'가 B급 감성이 돋보이는 독특한 로맨스 코미디였다면, '킬링 로맨스'는 남들에게 부조리하게 억압받던 약자들이 연대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대중의 시선과 연예 산업의 굴레에 자신을 끼워 맞췄던 여래는 도피처로 택한 결혼생활에서도 남편 조나단에게 휘둘린다.

그런 여래에게 손을 내민 것은 사수생 범우(공명). 온 가족이 서울대 출신인 집안에서 '미운 오리 새끼'로 살아온 그는 자신의 우상이었던 여래의 행복을 위해 살인 계획에 가담한다.

거대한 악(惡)에 대항할 용기가 사라질 때마다 서로를 응원하고 도우며 힘이 되어주는 두 사람의 모습은 뭉클한 감동을 안긴다.

웨스 앤더슨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유려한 미장센도 돋보인다.

파스텔톤으로 구현된 남태평양의 콸라섬과 원색으로 화려함을 더한 조나단의 저택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을, 매일 망원경으로 여래를 관찰하는 범우의 모습은 '문라이즈 킹덤'(2012) 속 주인공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B급 감성 더한 현대판 '인형의 집'…영화 '킬링 로맨스'
무엇보다 이 작품의 화룡점정은 배우들의 연기력이다.

여래 역의 이하늬는 영화 '극한직업'(2018), 드라마 '열혈사제'(2019)와 '원 더 우먼'(2021) 등에서 보여준 발군의 코믹 연기로 극을 이끌고, 여래의 조력자 범우를 연기한 공명은 귀여운 외모와 무해한 매력으로 그를 뒷받침한다.

이선균의 연기 변신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여래의 남편을 연기한 그는 우스꽝스러운 콧수염과 말투로 신선한 캐릭터를 만들어내며 그동안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보여준다.

이원석 감독은 시사회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정체된 순간에 나를 정말 생각해주는 사람이 용기를 주면 변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 같다"면서 "이 영화를 통해 용기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14일 개봉. 107분. 15세 관람가.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