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중달 교수 이름 딴 장학회 출범…"자치통감에는 인간 모습 담겨"
"한길 걸어온 덕에 '까방권'도…쉽게 가려는 학문적 태도 문제"
자치통감과 함께한 노학자의 반세기 열정…"이젠 함께 나누고파"
"어느 날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제게 '까방권'(까임 방지권의 준말)을 줘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한 길을 걸어온 걸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
권중달 중앙대 명예교수의 연구실 한쪽 벽면에는 커다란 중국 지도가 붙어 있다.

누구든, 또 언제든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읽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쉽게 설명해주기 위해서다.

기원전 403년 주나라 위열왕 때부터 송나라 건국 직전까지 약 1362년 역사를 다룬 책이다 보니 만만치 않은 범위. 그는 지도를 손으로 가리키며 책 속 이야기를 찬찬히 짚어준다.

스스로는 '미련스러운 외골수'라 말하곤 하지만,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자치통감 최고 권위자다.

권 교수의 학문적 업적과 정신을 계승하고 연구를 활성화하기 위한 장학회가 15일 공식 출범한다.

1979년 '자치통감이 중국과 한국의 학술에 미친 영향'을 주제로 한 논문을 시작으로 50년 가까이 자치통감을 번역·연구해 온 그의 뜻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다.

권 교수는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오랜 기간 연구해 온 학자로서 자치통감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을 지원하는 '학문적 선순환'을 만들어 함께 나누고 싶다"고 장학회 출범 소감을 밝혔다.

권 교수는 "나 역시도 오랜 기간 연구하기까지 쉽지 않은 길을 걸어왔다"고 돌아봤다.

자치통감과 함께한 노학자의 반세기 열정…"이젠 함께 나누고파"
중국 북송 시대의 역사가 사마광(1019∼1086)이 쓴 자치통감은 동아시아 역사와 정치의 보고(寶庫)로 꼽히지만, 권 교수가 294권을 모두 번역했던 2000년대 초반 당시 책을 내주는 출판사가 없었다.

결국 권 교수는 2006년 중앙대에서 정년 퇴임하면서 받은 퇴직금으로 출판사를 직접 차려 책을 냈다.

그는 "원고는 완성됐는데 출판해줄 곳이 없었다.

당시 퇴직금이라면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지만 그걸 포기하고 지원해준 가족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장학회 이사장을 맡은 아내 정철재 씨는 "남편은 평소 '지금까지 장학금을 받아 공부할 수 있었다'며 꼭 기회가 된다면 어려운 후학을 위해 도움을 주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고 전했다.

대만에서 유학하며 만난 두 사람이 결혼한 지 50주년이 되는 올해 소원을 이룬 건 더욱 뜻깊다.

"'자치통감' 한 우물을 파서 50년 동안 연구에 매진하는 남편을 보면서 꼭 소원을 이뤄주고 싶었어요.

제가 봐도 대단한 사람이거든요.

그 뜻이 오래오래 이어지길 바랄 뿐입니다.

"
권 교수는 오늘날에도 자치통감이라는 창(窓)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이 많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치통감은 중국의 역사라고 할 수 있지만 더 나아가서 인간의 역사"라며 "이 책을 누구보다 가까이했던 세종대왕은 불후의 명군으로 자리 잡았고, 마오쩌둥은 피난길에도 이 책을 놓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역사는 구심력과 원심력의 상호 작용으로 이뤄지는 다이내믹한 움직임"이라고 했다.

40여 년 한 길을 걸어온 권 교수는 최근 학계 분위기에는 다소 아쉬움을 내비쳤다.

자치통감과 함께한 노학자의 반세기 열정…"이젠 함께 나누고파"
그는 연구 논문을 쓸 때 필요한 부분만 번역본을 발췌해 읽는 행위를 '인덱스(index) 논문'이라 언급하며 "시대적 분위기나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 미시적으로만 보면 잘못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쉽게 가려는 태도가 바뀌지 않는 한 학문적 발전은 어려울 것"이라고 쓴소리를 냈다.

어느덧 팔순을 넘긴 나이지만, 권 교수는 여전히 자치통감을 놓지 않고 있다.

지난해 총 28권으로 구성한 애장본을 내놓은 뒤, 이번에는 '속자치통감' 한글 번역 작업 중이다.

총 220권 중 이미 130권까지 작업을 마쳤다.

'그 많은 작업을 어떻게 혼자 하냐'는 아내의 말에 권 교수는 "장학회가 생기면 후학이 이어서 할 것"이라며 웃었다고 한다.

"자치통감을 한마디로 말하면요? 인간의 모습이죠. 황제나 황후, 장군, 정치인 등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죠. 각 세력이 부딪치고 균형을 찾아가는 모습 속에서 결국 우리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
장학회는 이날 출범하면서 첫 활동으로 '통감 리더십'을 주제로 한 강의를 연다.

서울 관악구 남현동주민센터에서 열리는 강의는 권 교수가 직접 강연자로 나서 역사 속 최고 지도자들이 왜 자치통감을 읽었는지 설명하고 오늘날에도 적용할 수 있는 가르침을 전한다.

장학회는 연말까지 매달 강의를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4월 강의는 내부 사정으로 취소한 상태다.

장학회 관계자는 "추후 상황을 보고 강의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라며 "기금을 조성해 내년부터 자치통감을 연구하는 대학원생을 장학생으로 선발해 장학금을 주는 계획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