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저-뫼스트와 빈필은 3일 공연 전반부에서 바그너의 ‘파르지팔’ 전주곡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죽음과 변용’을 끊임없이 이어 연주했다. ‘구원’과 ‘해방’이라는 키워드로 엮인 두 작품 사이의 연결고리를 조명한 것이다.

‘죽음과 변용’에서 빈필이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중 하나임을 증명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목관악기들은 서로의 톤을 완벽하게 맞춰 보였고, 직후 등장하는 악장 알베나 다나일로바의 압도적인 표현력에서 빈필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날카롭게 고통을 묘사하고, 여러 모티브가 혼란스럽게 뒤섞이는 장면에서도 잘 정제된 음악이 흘러나왔다.

가장 무질서한 순간을 만들기 위해 이들은 가장 질서정연한 음악을 선보였다. 정교하게 질서가 잡힌 음악만이 무질서한 혼돈의 순간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승과 하강으로 묘사되는 삶과 죽음의 이중주와 그 뒤로 흘러가는 심장박동과 한숨의 모티브까지 세밀하게 직조했다.

죽음을 알리는 탐탐 소리와 함께 마지막 여정이 시작됐다. 벨저-뫼스트는 그동안 절제된 연주를 조금씩 놓아주기 시작했고, 빈필 고유의 색깔이 본격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 결과로 슈트라우스가 음표로 구축해 놓은 죽음 이후의 세계가 아름답게 빛났다. 지휘자는 군더더기 없는 연출로 작품 그 자체를 조명했고, 빈필은 작품에 황금빛을 더했다. 슈트라우스의 천재성이 어떻게 발휘됐는지 입증하는 연주였다.

후반부에 연주된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8번에서도 깔끔하게 정제된 벨저-뫼스트의 스타일이 여실히 드러났다. 밋밋하게 흘러갈 수 있는 1악장과 2악장의 나머지 색깔을 채워준 것은 빈필 단원들이었다. 이들은 악보의 음들을 단순히 이어가는 차원이 아니었다. 시시각각 서로의 흐름을 읽으며 뉘앙스를 통일하고, 밸런스를 맞추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오케스트라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였다. 단원 개개인이 특출난 예술성과 기량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 왔기 때문에 가능한 경지였다. 결국 음악을 조율하고 완성하려는 것은 지휘자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단원이 매 순간 지휘자였다.

앙코르는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카나리아 왈츠’였다. 빈필이 아니면 흉내도 낼 수 없는 음악이었다. 모든 단원이 하나가 돼 왈츠를 췄다. 리듬을 밀고 당기며, 왈츠가 가진 찰나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왈츠가 정점에 달할 무렵 새소리가 들리며 아침을 불러오고 있었다.

허명현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