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초만 해도 살아 있는 식물을 운반하는 것은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관계자들은 운반에 종자를 이용하기도 했는데, 이마저도 성공 확률이 희박했다.
이동 중 수분이 말라버려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열대 지방에서 자란 종자는 습한 곳에 보관하면 곰팡이가 폈다.
영국 식물학자 존 리빙스턴은 1819년 중국에서 영국 런던으로 살아 있는 식물을 보내는 어려움에 관해 기록했는데, 이에 따르면 중국 식물 1천 개체가 영국에 도착해 살아남은 경우는 1개(0.1%)에 불과했다.
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의 희귀한 식물을 본국에 보내고 싶어했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구세주가 등장했다.
워드의 상자라고 불리는 '워디언 케이스'가 발명된 것이다.

그는 단단한 목재로 제작된 상자를 만들었다.
윗부분에는 지붕 모양의 경사진 면을 만들었는데, 여기에 유리를 끼워 넣었다.
유리 위로는 철망을 깔거나 목재 띳장을 덧대 유리를 보호하면서 빛은 들어오도록 했다.
이 상자 안에 식물을 화분째 넣거나 바닥에 직접 흙을 깔고 그 안에 심어 보냈다.
워드는 길이 120㎝, 폭·높이 90㎝ 규모의 두 상자에 양치류·이끼 등을 담아 당시 가장 긴 항로였던 런던에서 시드니에 이르는 바닷길에 실어 보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는 곧 그 역방향에 대한 실험도 착수했다.
영국에선 자라지 않는 풀고사리를 포함한 식민지 농산물을 가득 실은 배가 시드니에서 런던을 향해 출발했다.
열대 지방을 지날 때는 섭씨 37도가 넘었다.
영하 6도 아래로 떨어지는 곳도 통과했다.
런던에 도착했을 때는 섭씨 4도. 얼음이 얼기 직전의 날씨였다.
극심한 온도 변화를 겪었음에도 상자 내부 식물은 "아주 건강하고 싱싱한 상태"를 유지했다.
실험이 대성공한 것이다.

이에 따라 호주 깊은 밀림에 숨어 있던 작은 양치류부터 인도의 난초, 일본의 인동덩굴, 말레이시아의 식충식물 등 다양한 식물이 상자에 담겨 유럽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이렇게 '식물의 세계화'가 이뤄졌지만, 부작용도 속출했다.
제국의 식민지 수탈이 가속화한 것이다.
워디언 케이스로 식물 운반이 가능해지자 유럽 열강들은 열대 식물을 들여오기 위해 서로 경쟁했다.

인도에서는 차를,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에서는 고무를, 아프리카 국가에서는 커피를 대규모로 농작해 식민지의 영토와 산업 체계를 장악했다.
이는 전 세계 식생과 환경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다른 대륙으로 옮겨간 식물들은 새 터전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마구잡이로 번식해 생태계 균형을 무너뜨렸다.
또한 살아 있는 채로 옮기는 방식의 특성상 흙과 식물에 묻어 있는 병충해와 바이러스가 옮아가는 경우도 허다했다.
아름다운 외양 덕에 일본에서 서양으로 들어온 인동덩굴은 미국 동부 산림을 온통 뒤덮은 침입종이 됐다.
흙 속에 숨어 들어온 뉴기니의 편형동물은 서양 토종 달팽이를 멸종시켰다.
이런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검역도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워디언 케이스는 새로 정립된 검역 체제에 따라 식물을 운반하는 즉시 안에 담긴 흙과 함께 소각됐다.
현존하는 워디언 캐이스의 수가 적은 것은 이 때문이다.

저자는 백 년에 이르는 워디언 케이스의 역사를 발굴하기 위해 상자의 긴 여정을 따라가며 역사적 기록의 파편을 주워 담았다.
저자는 "19세기에는 수만 개까지는 아니더라도 수천 개의 워디언 케이스가 전 세계를 누비며 식물을 운반했다"며 "마시고 먹고 냄새 맡고 입는 우리의 선택이 식물의 이동으로 변혁을 맞았다.
이 모든 변화를 목격한 물건, 그것이 워디언 케이스"라고 말한다.
푸른숲. 정지호 옮김. 408쪽. 2만5천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