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깃발의 세계사'
국기에 새겨진 인류 역사의 결정적 장면들
9·11 테러가 벌어진 날 미국 뉴욕의 소방관 세 명이 폐허가 된 세계무역센터에 성조기를 올렸다.

이 장면을 찍은 한 사진기자는 "미국인들의 힘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깃발은 국가 또는 조직의 이상과 신념을 공유하고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도록 만든다.

최근 국내에 번역·출간된 '깃발의 세계사'는 성조기부터 성소수자들의 상징인 무지개 깃발까지 여러 깃발들의 유래와 에피소드를 들여다보는 책이다.

국제문제 전문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풀어내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사건들과 마주하게 된다.

국기는 대개 역사적 격변기에 만들어지는 탓이다.

고대 이집트 등지에서도 기장과 상징을 그린 천이 사용됐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깃발이 널리 퍼져나간 때는 중국이 비단을 만들어내면서부터다.

가볍고 바람에 잘 휘날리는 비단은 실크로드를 통해 아랍권과 유럽에 전파됐다.

그러나 막상 중국은 19세기 중반 유럽인들이 몰려오기 전까지 굳이 자신들을 상징하는 깃발을 만들지 않았다.

오늘날 오성홍기의 원래 도안에 있던 낫과 망치는 소련을 너무 강하게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사라졌다.

노란색 큰 별은 공산당의 지도력을, 네 개의 작은 별은 계급들에 대한 마오쩌둥의 '연합전선' 구상을 상징한다.

여기에는 뜻밖에 '애국적인 자본가'가 포함돼 있다.

저자는 "40년 뒤 당이 '중국식 자본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선견지명이 있는 판단이었다고 해도 될 것"이라고 말한다.

국기에 새겨진 인류 역사의 결정적 장면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기는 13세기 초부터 쓰인 덴마크의 '단네브로'가 꼽힌다.

노르웨이·핀란드·스웨덴·아이슬란드는 모두 덴마크 국기의 색깔 정도만 바꿔 국기로 삼았다.

이탈리아의 삼색기는 나폴레옹 군대와 맞서 싸우던 의용군의 군복 색깔에서 유래했다.

러시아와 비슷하게 세 가지 색깔을 주로 쓰는 세르비아·슬로바키아·체코 등 동유럽 국가들의 국기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나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애쓴 슬라브 민족의 단합을 상징한다.

아프리카 대륙 국기는 빨간색과 황금색·초록색·검은색을 주로 쓴다.

식민지 시대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점령당하지 않은 나라인 에티오피아 국기가 근원이 됐다.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깃발은 하켄크로이츠(갈고리 십자가)가 새겨진 나치당 깃발일 것이다.

하켄크로이츠는 고대부터 인도에서 종교적 상징으로 쓰이는 스와스티카에서 유래했다.

히틀러는 독일인이 인더스 계곡 지역에서 이주한 아리아 민족의 후손이라고 믿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은 나치당 깃발을 법으로 금지하고 바이마르공화국 국기를 되살렸다.

반면 일본은 전쟁 당시 국기를 그대로 쓰고, 1954년 출범한 자위대는 해군 깃발이었던 욱일기를 다시 군기로 채택했다.

저자는 일본이 국기를 바꿨다면 주변국과의 전후 화해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꼬집는다.

푸른숲. 팀 마셜 지음. 김승욱 옮김. 388쪽. 1만8천원.
국기에 새겨진 인류 역사의 결정적 장면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