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 선보였던 영화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에서 당당하게 을지로를 걷던 토익반 친구들 무리에 머리 하나가 쑥 올라오는 사람이 있었다.
첫 토익 수업에서 "전국 상고에서 1, 2등 하던 애들"이라며 "진도 팍팍 나가라"고 외치고, 주인공 3인방에게 회사 비리에 대한 결정적인 제보를 건네준 전략기획실 사원 소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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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넘게 모델 일을 했지만 세상의 기준에서 성공하지 못했고, 단편 영화로 배우 생활을 시작한 지 이제 7년차.
몇몇 독립영화 주연과 상업영화 단역을 거쳐 '독전'(2018)에서 천재 마약 제조 기술자인 농아 남매의 동생 역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가 주연한 독립영화 '액션히어로'는 최근 폐막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작품상과 배우상(이석형), CGV배급지원상, '왓챠'가 주목한 장편상 등 4관왕을 차지했다.
최근 화상으로 만난 그는 편안하게 이야기하다가 수상 이야기에 잠시 울컥했다.
"석형이와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고 어떻게 준비하고 연기했는지 잘 아니까 제가 상을 받은 것보다 더 기분이 좋았어요.
감독님도 준비하면서 고생 많이 한 걸 아니까 이런 성과가 너무 행복하고, 제가 축하해 줄 수 있는 마음이 드는 것도, 이런 팀을 만난 것도, 이런 순간을 같이 나눌 수 있다는 것도 정말 감사하고 좋았어요.
"
이석형과는 모델 일을 그만두고 처음 간 연기학원에서 만난 사이라고 했다.
이주영은 20대 후반이었고, 나이는 어렸지만 2∼3년 먼저 시작한 이석형이 도움을 주고 친하게 지내며 인연을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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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감독님이 생각했던 리스트에 제가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땐 제가 상업 영화와 드라마를 한창 할 때라 독립 영화는 안 하는 거 아닌가 하셨다고요.
제가 먼저 말하길 잘했구나, 말 안 했으면 어쩔 뻔했나 하면서 이런 게 인연인가보다 하는 생각도 했죠."
'액션히어로'는 꿈은 액션 배우지만 공무원 준비생인 대학생 주성(이석형)이 부정 입학을 저지르는 연극영화과 차 교수(김재화)에게 온 협박 편지를 발견하고 이 사건을 영화로 찍으며 악당을 때려잡는 코믹 액션 영화다.
이주영은 한때 액션 배우를 꿈꾸는 연극영화과 학생이었으나 현실과 타협하고 차 교수 밑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대학원생 선아를 연기했다.
'액션히어로'는 영화 안에서 학부생이었던 선아가 주인공이었던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주성이 우연히 보고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주영은 선아를 두고 "고개를 돌려보면 어디나 있을 법한 사람이자, 저의 20대의 모습이기도 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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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했고 좌절도 많이 하고 번아웃 증후군도 왔어요.
당시엔 왜 나한테는 힘든 일만 있나 했는데, 돌이켜보면 배우 일을 하는 데 당시 감정들이 좋은 기반을 만들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선아는 (현실과 타협하기 전에) 배우 중에서도 액션 배우를 꿈꿨던 활기 있는 인물인데, 저도 꽤나 열정적인 사람이었거든요.
"
조교로 시급 8천원을 벌고 있는 대학원생 선아는 차 교수 지시에 따라 성적을 조작하고, 교수의 차를 대신 운전한다.
그래서 "웃는 일이라고는 허탈하거나 사회적 가면이 필요할 때고, 무표정하거나 인상을 쓰는 미세한 표정 변화에 슬프고 무기력한 좌절이 희미하게나마 보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또래들이 많은 촬영 현장이 너무 즐겁고 좋아서 웃음을 참고 자제하는 게 오히려 힘들기도 했다"고도 했다.
영화를 좋아해 시나리오도 써보고 공연을 보러 다닌 것도 좋아했지만 "배우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 했다"는 그는 친한 미술 작가의 전시 오프닝 영상을 찍으면서 주변의 제안에 연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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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도 밝아지고요.
이게 나한테 잘 맞는구나, 해야겠다 싶었죠. 모델 할 때는 10년 넘게 일이 안 풀렸는데 연기 시작하고는 바로 '몸값'(이충현 감독의 단편 영화)을 만났으니 운이 좋았죠."
그는 "내가 느끼는 안 좋은 감정을 사람들이 몰랐으면 좋겠고, 그래서 잘 감추는 성격이었다"며 "연기할 때는 그런 걸 벗어나 자유로운 해방감을 느낀다"고 했다.
또 "모델은 제일 화려하고 멋있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면, 배우는 최악의 밑바닥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멋있는 척하는 게 힘들어서 나는 배우가 잘 맞는 것 같다"고 했다.
"항상 새롭게 느껴주셨으면 좋겠고, 그 고민을 가장 많이 해요.
믿고 볼 수 있다는 신뢰감을 주는 배우가 되고 싶고요.
또 제 연기를 보고 누군가 위로받으면 좋겠습니다.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