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조실록은 조선과 일본의 기나긴 전쟁인 임진왜란 시작을 이렇게 기술했다.
1592년 4월 부산을 습격한 왜군은 거침없이 북상했고, 임금 선조는 수도를 버리고 북쪽으로 피신했다.
명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복잡해졌고, 승패도 한동안 결정되지 않았다.
일본은 1597년 다시 한번 조선을 침략했으나, 이듬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사망하면서 물러갔다.
근대 이전에 한·중·일이 전면전을 벌인 사실상 유일한 사례로 평가되는 임진왜란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동아시아 관계사를 연구하는 국제정치학자인 김영진 국민대 교수는 신간 '임진왜란'(성균관대출판부 펴냄)에서 이 전쟁을 '2년 전쟁 12년 논쟁'으로 본다.
실제로 임진왜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기간은 1592년 4월∼1593년 6월, 1597년 5월∼1598년 1월, 1598년 8∼11월이다.
저자는 이에 더해 1589년 6월 쓰시마섬 도주(島主)의 조선 방문과 통신사 파견 요구부터 1600년 9월 명군 철수까지 햇수로 12년을 임진왜란으로 간주한다.
저자는 한때 명군의 조선 원정 책임자였던 손광(孫鑛)이 남긴 문집과 손광에 이어 조선 문제를 총괄한 형개(邢玠)의 문집 등 그동안 국내에서 잘 활용되지 않은 자료를 연구해 임진왜란을 글로 풀어냈다.
그는 임진왜란에서 조선에 위기와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고 분석한다.
일단 위기로 지목한 순간은 국왕 피난에 이어 '내부'(內附) 문제가 논의됐을 무렵이다.
내부는 '다른 나라가 들어와서 붙는다'는 뜻으로, 임금이 명에 망명하겠다는 말이었다.
저자는 "내부가 이뤄졌다면 조선은 무정부 상황이 되고, 정상적 전쟁 수행은 더욱 어렵게 됐을 것"이라며 "조선은 이순신과 의병 활약 덕분에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강조한다.
이어 그는 1590년 조선통신사 파견 이전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도발 가능성이 제기됐으나, 조선이 명 중심의 장기적 평화에 안주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또 조령, 추풍령, 한강, 임진강, 대동강 같은 천연 지형을 이용해 왜군을 막아냈다면 조선이 주도권을 잡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국제정치학자답게 조선과 명, 조선과 일본의 관계도 심도 있게 고찰한다.
그는 "왜군을 스스로 축출할 능력이 부족했던 조선은 명의 군사적·외교적 힘에 의지했다"며 "전쟁 초기 조선과 명은 상호불신 속에 시간을 낭비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명군이 적어도 대동강을 방어할 수 있을 정도로 협력했다면 조선은 평양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고, 국왕이 의주에 있는 것보다는 조선의 협상력도 더 커졌을 듯하다"며 "정유재란 시기에 명은 조선에 대한 직접 지배를 통해 왜군에 대한 근본적 대응을 모색했다"고 비판한다.
즉 조선과 명은 동맹이 아닌 조공과 책봉으로 얽힌 사실상 주종관계였음에도 명이 '소국은 대국을 받들고 대국은 소국을 보살핀다'는 '사대자소'(事大字小)를 실천하기보다 자국 이익을 챙기려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명의 파병과 철수는 조선의 입장과 무관하게 자국의 전략적 판단 아래 이뤄졌고, 조선의 피나는 외교적 시도는 명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을 경우 번번이 한계에 부딪혔다"며 "이는 전통 동아시아 질서 개념으로서 통용되는 조공체제가 허구적이고 위선적이었음을 말해준다"고 역설한다.
조선과 일본 교섭에 관해서는 "왜군은 결국 조선 왕자를 일본에 파견하는 수준에서 철수했을 가능성이 크다"며 "명에 기대지 않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강화협상에 임했다면 정유재란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현재로 돌아와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어 있는 한국 문제의 해법도 제시한다.
그는 "양자택일은 궁극적 대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자신의 역량과 공유된 가치를 바탕으로 다수의 지원세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948쪽. 4만3천5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