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글로벌 법인세 과세체계를 개편하겠다고 나서면서 한국 기업에 ‘비상’이 걸렸다. 그중에서도 글로벌 기업의 법인세를 실제 매출이 발생한 국가에서 걷자는 내용이 확정되면 기업들은 해외 전략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하는 상황에 몰릴 수 있다.9일 경제계에 따르면 다수 국내 기업들은 미국 재무부가 세계 약 140개 국가에 법인세 개편 제안서를 보낸 사실을 확인한 뒤 비상대책회의를 열었다. 한 10대그룹 전략 담당 임원은 “매출에서 해외 판매가 차지하는 비중이 갈수록 커지고 있어 글로벌 법인세 체계 개편이 미치는 영향을 바로 받게 된다”며 “법인세 비용이 늘어날 가능성이 커 걱정스럽다”고 말했다.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LG전자 등 국내 주요 기업은 미국에서 13조~35조원의 매출을 내고 있다.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4~28%에 달한다. 현대차는 지난해 375만 대의 차량을 글로벌 시장에서 판매했는데 이 중 67만 대(17.9%)를 미국에서 팔았다. 이 가운데 38만 대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수출한 물량이다.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대선 공약으로 법인세율을 현행 21%에서 28%로 올리는 방안을 제시했다. 미국의 세액공제 등을 따져봐야 하지만 세율만 놓고 보면 국내 법인세 최고세율(25%)보다 높다. 해외 생산과 판매, 가격 전략까지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삼성전자와 현대차, LG전자 등은 지금까지는 국내에서 생산된 제품을 보내면서 이전가격을 조정하는 방법으로 국내 본사에 최대한의 이익을 남겨왔다. 하지만 과세체계가 개편되면 미국 세무당국의 감시를 받게 될 수 있다는 우려다.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도 이전가격과 관련한 정보 교환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지금은 미국 판매법인의 이익을 최소화하거나 적자를 내는 방법으로 세금을 피해왔지만 미국 정부가 이전가격을 들여다본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한편 구글과 애플, 아마존 등 글로벌 기업의 국내법인은 한국에서 수천억원의 법인세를 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구글코리아 등은 서버가 싱가포르나 아일랜드 등에 있다는 이유로 국내에 세금을 거의 내지 않고 있다. 구글플레이는 지난해 국내에서 6조원 규모의 매출을 냈지만, 법인세는 한 푼도 안 냈다. 국내에 고정사업장이 있어야 과세할 수 있는데, 디지털 기업의 고정사업장은 서버란 점을 이용해 조세를 회피해왔다.미국 정부의 제안대로 과세체계가 바뀌면 한국에서 수익을 낸 만큼 법인세를 내야 한다. 이들이 내게 될 법인세는 최근 국세청의 추징 규모로 가늠할 수 있다. 국세청은 작년 구글과 아마존에 각각 6000억원, 1500억원의 법인세를 추징했다. 국세청은 구글, 아마존의 실질적인 기업 활동을 보면 사실상 한국에 고정사업장을 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해석해 그동안 못 거뒀던 법인세를 징수했다.도병욱/서민준 기자 dodo@hankyung.com
주식 투자는 ‘예측’과 ‘확인’의 반복 게임이다. 애널리스트들이 내놓는 실적 예측치가 모여 컨센서스를 이룬다. 컨센서스는 매 분기 실적 시즌에 그 정확성을 확인받는다. 지난 7일 삼성전자가 1분기 실적을 발표했다. 유동성 장세에서 실적 장세로 넘어가는 상황이라 투자자는 숨죽여 결과를 기다렸다. 며칠 동안 시장에선 관망세가 뚜렷했다.삼성전자가 어닝 서프라이즈(깜짝 실적)를 내놓으면 실적 장세가 탄력을 받을 것이란 기대가 적지 않았다. 실적 발표 전날 펀드매니저 A씨는 “삼성전자 실적이 컨센서스보다 좋은데 주가가 빠지면 시장의 실제 기대치가 훨씬 높았다는 의미이고, 컨센서스에 미치지 못하는 실적을 내놨는데 주가가 뛰면 실제 기대치가 낮았다는 의미”라며 “삼성전자 실적에 대한 시장 반응은 이번 실적 시즌의 가늠자”라고 설명했다.삼성전자는 영업이익 9조3000억원을 기록해 컨센서스(8조9000억원)를 뛰어넘는 실적을 발표했다. ‘수치’로는 어닝 서프라이즈다. 하지만 ‘내용’을 놓고선 다른 반응이 나왔다.애널리스트 B씨는 “시장에선 삼성전자가 비메모리에서 TSMC를 따라잡겠다고 한 점을 주목하면서 비메모리 성과를 기대했는데 결과는 휴대폰과 가전 실적이 좋았다”며 “서프라이즈라고 보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그는 “그래서 실적 발표 날 주가도 ‘얌전하게’ 끝났다”고 덧붙였다.삼성전자 실적이 시장에 인상적인 변화를 만들지 않았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큰 환호도 큰 실망도 없는’ 어정쩡한 상황으로 볼 수 있다. 다만 내용이야 어떻든 어닝 서프라이즈에도 불구하고 시장이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은 점은 시장의 실제 기대치가 상당히 높았다는 방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다른 종목에 대해서도 실적을 좀 더 엄격하게 따지겠다는 신중한 분위기가 지배적임을 의미한다.삼성전자 실적은 외국인 스탠스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계기로도 관심을 모았다. A씨는 “기관은 원래 (투자할) 돈이 없고, 개인은 비트코인 때문에 주춤하고 있어 ‘돈줄’은 외국인밖에 없는 상황이라 삼성전자 실적이 외국인의 스탠스를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삼성전자가 수치는 좋지만 내용은 아쉬운 실적을 내면서 외국인 스탠스 파악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진단했다.이달 들어 연일 삼성전자를 순매수하고 있는 외국인은 실적 발표 당일에도 순매수를 이어갔지만 이튿날 순매도로 돌아섰다. 증권가에선 외국인의 ‘사자’에 신중론이 많다. 박희찬 미래에셋증권 연구위원은 “외국인에 대해 그다지 기대하지 않는다”며 “실적 기대감이 높다고 해서 한국 주식 순매수를 예상하기엔 상황이 우호적이지 않다”고 말했다.그는 중국 증시에 대한 외국인 투자자의 센티먼트(심리)가 좋지 않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중국이 경기 부양 일변도가 아닌 것과 미국의 대(對)중국 견제로 인한 부정적 측면을 우려해 외국인 투자자가 중국의 투자 매력을 낮게 평가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아시아에 대한 투자가 약해지고 있고 한국도 예외가 아니라는 설명이다.조익재 하이투자증권 전문위원은 “미국 시장에서 금리 이슈가 불거지자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시장으로 저가 매수를 노린 자금이 많이 들어왔는데 이 추세가 이어질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은 각종 부양책이 워낙 강해 올해 미국 기업은 코로나19 이전 이익 수준을 뛰어넘어 실적 장세가 본격화할 수 있지만 한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는 사정이 다르다”고 설명했다.애널리스트들은 삼성전자가 3분기엔 영업이익 10조원을 넘어설 것이란 ‘예측’을 내놓고 있다. 그런 예측에 기반해 다음달부터 주가가 의미 있는 반등세를 보일 것이라고 한다. 예측과 확인의 반복 게임이 다시 시작된다.장경영 한경 생애설계센터장 longrun@hankyung.com
9일 오전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정부와 반도체산업협회 회장단의 간담회가 열렸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이정배 협회장(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장), 이석희 SK하이닉스 사장 등 주요 기업 경영진이 마주 앉았다. 주무부처 장관과 반도체 기업인들의 대면은 연초 반도체 대란이 본격화한 지 석 달 만이다.간담회는 예정보다 20분 늦게 끝났다. 행사 후 공개된 협회 명의의 대(對)정부 건의문엔 반도체 패권 전쟁에 내몰린 기업들의 절박함이 묻어났다. 협회는 반도체산업지원특별법 제정을 통한 투자 인센티브 확대 등 신속하고 실효성 있는 지원을 요청했다. “시설투자 50% 세액공제 필요”이날 만남은 산업부의 요청에 따라 성사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반도체협회는 지난달 취임한 이 협회장과 회장단 상견례를 겸해 조찬행사를 준비했다. 그런데 성 장관이 참석 의사를 전해옴에 따라 서둘러 건의문을 준비한 것으로 전해졌다. 연초 시작된 반도체 품귀 현상이 전(全)산업으로 확산 중이다. 미국 중국 등의 반도체 패권 경쟁은 나라로 격화되고 있다. 그 사이 업계와 학계에선 “우리 정부가 기업 지원에 손을 놓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성 장관이 뒤늦게 나선 이유도 이런 비판을 고려했기 때문이라는 평가다.협회는 이날 크게 네 가지를 정부에 요청했다. 우선 국내 반도체 제조시설 구축 확대를 위해 전폭 지원해달라고 했다. 간담회의 주요 화두도 ‘반도체 시설투자에 대한 인센티브’ 방안이었다. 참석자들은 정부에 “연구개발(R&D) 및 제조설비 투자비용에 대해 50%까지 세액공제가 필요하다”며 “양산용 제조설비 투자비용도 세액공제 대상 범위에 포함돼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에 못 미치는 반도체 지원조세특례제한법에 따르면 대기업의 시설투자세액공제는 기본 1%다. 정부는 올해부터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 지능형 마이크로센서 등 ‘신성장기술분야’ 시설투자에 대해 공제율을 기본 3%로 올렸다.하지만 지원 수준이 미국, 유럽연합(EU) 등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미국은 자국 내 반도체 공급망 강화를 위해 반도체 설비투자액의 40%를 세금에서 공제해주는 등 강력한 인센티브 정책을 마련 중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최근 500억달러(약 56조원) 규모 반도체산업 육성 방안도 발표했다.중국 역시 2025년까지 총 170조원을 반도체산업에 투자할 계획이다. EU도 67조원 규모 이상의 ‘반도체 제조기술 발전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이 협회장은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정부의) 전방위적이고, 적극적인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인프라 건설 총력 지원”간담회에선 “반도체 제조시설 인프라에 대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신속하고 원활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얘기도 나왔다.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각각 경기 평택과 용인에 100조원 이상을 투자해 최신 반도체공장을 짓고 있다. 문제는 전력 및 용수 조달 방안이다. 공장 인근 지자체들이 송전선로나 용수로 통과를 반대하며 기업들을 압박하고 있어서다.반도체 전문 인재 양성·공급 방안도 화제에 올랐다. 협회는 △수도권 대학의 반도체 관련 학과 신설 및 정원 확대 △반도체 인력아카데미 설립 △석박사 과정 인력양성사업 등의 조속한 추진을 촉구했다.산업부는 ‘총력지원’ 의사를 밝혔다. 성 장관은 “업계의 건의사항을 반영해 종합정책을 수립하고 곧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반도체산업지원특별법 제정, 세제지원 등 업계의 건의 사항이 정책에 충분히 반영될지는 미지수다. 세제 지원은 기획재정부, 수도권 반도체학과 신설은 교육부 등이 주무부처인 만큼 범정부 차원의 협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정부가 ‘패스트트랙’을 통해 반도체산업을 파격적으로 지원해야 패권전쟁에서 K반도체가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황정수/이수빈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