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화의 무역인문학] 모든 학문을 삼키는 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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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학문을 삼키는 물리학
이제 인간의 세계는 과학적이지 않으면 ‘거짓’ 또는 ‘상상의 산물’이라고 받아들여진다. 인류 최초 학문이 철학이고 그후 다양한 분기를 이루었다. 그리고 과학을 기점으로 한 자연과학은 자연에 존재하는 사물의 구조.성질.법칙 등을 관찰 가능한 방법으로 얻어진 체계적 이론적 지식 체계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인간이 마침내 먼 우주로 탐사선을 보내면서 우주의 시작인 ‘빅뱅’을 알아냈을 때 인간은 신에 의한 천치창조 믿음을 거두기 시작했다.
진리란 무엇일까?
인간이 철학을 할 때부터 물어왔던 질문이다. 그런데 물리학을 읽다보면 물리학이 철학대신 그 대답을 해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다만 철학은 ‘진리’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물리학은 ‘최종이론’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뿐이다. 스티브 와인버그는 그의 책 ‘최종 이론의 꿈’에서 우주의 모든 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 최종이론을 찾아낸다면 우주 만물의 움직임을 관장하는 ‘신’을 만날 것이라고 했다. 과학의 역사를 통틀어 우리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천상의 탈신비화’, 생명체의 놀라운 재능들이 외부자의 계획이나 안내 없이 어떻게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했는지를 보여주는 ‘생명의 탈 신비화’가 이루어져 왔다. “과학의 가장 극단적인 희망은 최종 법칙들과 역사적인 우연성들을 모두 포함해 자연 현상 전체를 설명하는 것이다”고 한다. 종교적으로 보면 ‘유일신’만이 가능한 일을 인간의 과학이 시도하고 있다. 그래서 종교와 과학은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다. 그렇다면 종교와 신의 화해는 가능할 까? 인간이 복제동물을 만들고, 천체 망원경을 통하여 수백억 광년 떨어진 머나먼 우주의 세계를 보면서 다수의 과학자들은 이미 ‘신의 존재’는 비논리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세상은 만인의 이기심에 의하여 작동한다는 경제학도 사람이 움직이는 과정을 수자로 표시하려다 보니 인간의 마음을 무시하고 물리학처럼 되어가고 있다. 바로 경제물리학, 사회물리학이 그렇다. 수많은 자연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누구나 같은 물리학의 법칙을 따른다는 가정이다. 물리학의 원리가 중력이나 시간이라면, 경제학은 ‘이기심’이라고 할 수있다. 마크 뷰캐넌은 그의 저서 ‘사회적 원자’에서 사회라는 조직을 개별적인 사람들의 모임으로 보았는 데, 각각의 사람들은 매우 단순한 논리에 따라 행동을 한다. 그런데 그게 아무도 의도하지 않는 자기조직화를 이루어 낸다고 했다. 자기 조직화의 핵심은 어떤 패턴이 저절로 생겨나는 데, 이 패턴은 그것을 만드는 부분의 세부적인 성질과 거의 또는 전혀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회물리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이란 그렇게 복잡한 단위가 아니라고 전제하고 시작한다. 이제 모든 것을 지배하는 현상은 물리학으로 대표되는 과학으로 통일되고 있다.
과학이 과학 기술과 합쳐지고, 그 결과가 상품화되면서 우리는 한 때 유토피아의 도래를 꿈꾸었다. 그러나 과학과 지식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어둠에 빠지고, 알 수도 없는 환상 속을 살아가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던 세상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현실 검증에 문제를 갖고 있으며 정신과 의사들이 ‘현실감 상실’이라고 부르는 증상을 보이고 있다. 그 것은 가끔 아무 것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현상이다. 인간이 존재하면서부터 변치않는 진리는 ‘인간은 땅을 밟고 사는 동물이다’이다. 그러나 이제 인간은 ‘가상의 세계를 떠도는 동물이다’라는 새로운 정의로 바뀌어야 한다. 컴퓨터를 하면서, 인터넷을 하면서, T.V를 보면서, 핸드폰을 하는 등 가상의 세계에서 움직이는 인류를 지켜본다면, 의식을 가지고 있는 시간중의 절반 이상을 가상의 스크린 속에서 지내는 것을 보게된다.
생명의 복제가 가능해짐에 따라 ‘인간은 무엇인가? 신의 창조물인가, 단세포에서 진화된 동물인가?’ 등 생명 본질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하였다면, 가상의 세계를 불러온 정보통신 공학의 발전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실존’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할 때, 인간은 집단 속에서 태어나 여러 집단에 소속되고 여러 집단을 형성하면서 그 생애의 궤적(軌跡)을 그려나간다. 그런데 가족 ·소꿉동무 ·학교 ·친구 ·회사 ·단체 등의 직접 접촉을 전제로 하는 사회가 아닌, 가상 공동체라고 할 때도 이런 정의가 여전히 유효한지 궁금하다.
가상 공동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인터넷이 실용화되기 시작한 1-2년이 지난 후이다.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면 아마도 1997년부터이다. 내 기억으로 내가 홈 페이지를 처음 만든 것이 1997년도이다. 그 당시만 하여도 대단히 생소하였던 인터넷은 불과 1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인류의 삶을 완전히 새롭게 하였다. 그런데 그 인터넷이 이제 또 새로운 기술 발전에 힘입어 엄청난 업그레이드를 하고있다. 선이 사라지고, 속도가 빨라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접속하고 있다. 유비쿼터스(ubiquotous). 우리 말로 번역하자면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좀더 명확하게 하자면, 전지(全知), 전능(全能), 전재(全在)라고 해야 맞는 말이다. 그야 말로 신에게나 해당하는 단어이다. 이제 인간은 과학의 힘으로 신의 영역에 들어서고 있다.
이제 인간의 세계는 과학적이지 않으면 ‘거짓’ 또는 ‘상상의 산물’이라고 받아들여진다. 인류 최초 학문이 철학이고 그후 다양한 분기를 이루었다. 그리고 과학을 기점으로 한 자연과학은 자연에 존재하는 사물의 구조.성질.법칙 등을 관찰 가능한 방법으로 얻어진 체계적 이론적 지식 체계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인간이 마침내 먼 우주로 탐사선을 보내면서 우주의 시작인 ‘빅뱅’을 알아냈을 때 인간은 신에 의한 천치창조 믿음을 거두기 시작했다.
진리란 무엇일까?
인간이 철학을 할 때부터 물어왔던 질문이다. 그런데 물리학을 읽다보면 물리학이 철학대신 그 대답을 해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다만 철학은 ‘진리’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물리학은 ‘최종이론’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뿐이다. 스티브 와인버그는 그의 책 ‘최종 이론의 꿈’에서 우주의 모든 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 최종이론을 찾아낸다면 우주 만물의 움직임을 관장하는 ‘신’을 만날 것이라고 했다. 과학의 역사를 통틀어 우리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천상의 탈신비화’, 생명체의 놀라운 재능들이 외부자의 계획이나 안내 없이 어떻게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했는지를 보여주는 ‘생명의 탈 신비화’가 이루어져 왔다. “과학의 가장 극단적인 희망은 최종 법칙들과 역사적인 우연성들을 모두 포함해 자연 현상 전체를 설명하는 것이다”고 한다. 종교적으로 보면 ‘유일신’만이 가능한 일을 인간의 과학이 시도하고 있다. 그래서 종교와 과학은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다. 그렇다면 종교와 신의 화해는 가능할 까? 인간이 복제동물을 만들고, 천체 망원경을 통하여 수백억 광년 떨어진 머나먼 우주의 세계를 보면서 다수의 과학자들은 이미 ‘신의 존재’는 비논리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세상은 만인의 이기심에 의하여 작동한다는 경제학도 사람이 움직이는 과정을 수자로 표시하려다 보니 인간의 마음을 무시하고 물리학처럼 되어가고 있다. 바로 경제물리학, 사회물리학이 그렇다. 수많은 자연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누구나 같은 물리학의 법칙을 따른다는 가정이다. 물리학의 원리가 중력이나 시간이라면, 경제학은 ‘이기심’이라고 할 수있다. 마크 뷰캐넌은 그의 저서 ‘사회적 원자’에서 사회라는 조직을 개별적인 사람들의 모임으로 보았는 데, 각각의 사람들은 매우 단순한 논리에 따라 행동을 한다. 그런데 그게 아무도 의도하지 않는 자기조직화를 이루어 낸다고 했다. 자기 조직화의 핵심은 어떤 패턴이 저절로 생겨나는 데, 이 패턴은 그것을 만드는 부분의 세부적인 성질과 거의 또는 전혀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회물리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이란 그렇게 복잡한 단위가 아니라고 전제하고 시작한다. 이제 모든 것을 지배하는 현상은 물리학으로 대표되는 과학으로 통일되고 있다.
과학이 과학 기술과 합쳐지고, 그 결과가 상품화되면서 우리는 한 때 유토피아의 도래를 꿈꾸었다. 그러나 과학과 지식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어둠에 빠지고, 알 수도 없는 환상 속을 살아가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던 세상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현실 검증에 문제를 갖고 있으며 정신과 의사들이 ‘현실감 상실’이라고 부르는 증상을 보이고 있다. 그 것은 가끔 아무 것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현상이다. 인간이 존재하면서부터 변치않는 진리는 ‘인간은 땅을 밟고 사는 동물이다’이다. 그러나 이제 인간은 ‘가상의 세계를 떠도는 동물이다’라는 새로운 정의로 바뀌어야 한다. 컴퓨터를 하면서, 인터넷을 하면서, T.V를 보면서, 핸드폰을 하는 등 가상의 세계에서 움직이는 인류를 지켜본다면, 의식을 가지고 있는 시간중의 절반 이상을 가상의 스크린 속에서 지내는 것을 보게된다.
생명의 복제가 가능해짐에 따라 ‘인간은 무엇인가? 신의 창조물인가, 단세포에서 진화된 동물인가?’ 등 생명 본질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하였다면, 가상의 세계를 불러온 정보통신 공학의 발전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실존’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할 때, 인간은 집단 속에서 태어나 여러 집단에 소속되고 여러 집단을 형성하면서 그 생애의 궤적(軌跡)을 그려나간다. 그런데 가족 ·소꿉동무 ·학교 ·친구 ·회사 ·단체 등의 직접 접촉을 전제로 하는 사회가 아닌, 가상 공동체라고 할 때도 이런 정의가 여전히 유효한지 궁금하다.
가상 공동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인터넷이 실용화되기 시작한 1-2년이 지난 후이다.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면 아마도 1997년부터이다. 내 기억으로 내가 홈 페이지를 처음 만든 것이 1997년도이다. 그 당시만 하여도 대단히 생소하였던 인터넷은 불과 1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인류의 삶을 완전히 새롭게 하였다. 그런데 그 인터넷이 이제 또 새로운 기술 발전에 힘입어 엄청난 업그레이드를 하고있다. 선이 사라지고, 속도가 빨라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접속하고 있다. 유비쿼터스(ubiquotous). 우리 말로 번역하자면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좀더 명확하게 하자면, 전지(全知), 전능(全能), 전재(全在)라고 해야 맞는 말이다. 그야 말로 신에게나 해당하는 단어이다. 이제 인간은 과학의 힘으로 신의 영역에 들어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