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프로 긁어 쓴 일필휘지…"단색조 회화에 서체를 끌어들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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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작가 이정지, 인사동 선화랑서 내달 3일까지 개인전
단색화 그룹 벗어나 독자 노선 걸은 1990년대 작품 선봬
탄탄한 밑작업 후 나이프로 물감 긁어 漢字 쓴 대작들
회화·글씨 결합해 조형성 높여..."작가에게 변화는 생명"
단색화 그룹 벗어나 독자 노선 걸은 1990년대 작품 선봬
탄탄한 밑작업 후 나이프로 물감 긁어 漢字 쓴 대작들
회화·글씨 결합해 조형성 높여..."작가에게 변화는 생명"

14일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개인전 ‘1990년대 단색조 회화-서체(書體)를 끌어들이다’를 시작한 이정지 화백(79)의 회고다. 1990년대는 그에게 크나큰 변화의 시기였다. 1972년 신세계화랑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연 그의 초기 작업은 특정한 형태가 드러나지 않는 비구상의 화면을 구축했다. 1980년대엔 물감의 축적과 나이프를 이용한 긁기의 반복으로 단색조 회화를 만들었다. 잘나가고 있는 ‘단색화가’ 그룹으로 분류됐던 시기다.
하지만 그는 1990년대 들어 ‘단색화’ 그룹에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독자 노선을 걸었다. 단색조 화면을 유지하되 거기에 한자 서예의 글씨를 도입한 것.

작업 과정은 지난하다. 그의 작품에서 긁어쓰기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밑작업이다. 그는 나이프로 한자를 긁어쓰기 전에 기초 다지기부터 철저히 한다. 캔버스 바탕에 젯소부터 바르는 일반적인 유화 제작 과정과 달리 그는 다양한 색조로 유화물감을 중첩해 쌓아 바탕을 다진다.

나이프로 글씨를 새기는 것은 작업의 하이라이트다. 오랜 노력과 기다림 끝에 찾아온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순간과도 같다. 이 순간을 위해 그는 밑작업을 다지고, 물감이 적당히 마르기를 기다리며, 자신의 신체적·정신적 컨디션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나이프로 속도감 있게 긁어서 글씨를 쓰려면 고도의 정신집중과 체력이 필요해서다. 일필휘지로 글씨를 쓰듯 나이프로 긁는 작업을 마치고 나면 온몸의 기운이 다 빠진 느낌이라고 한다.

이번 전시에는 이 화백의 1990년대 작품을 중심으로 근작들을 포함해 35점을 걸었다. 전시장 벽을 가득 채우는 대작이 많다. 그는 “작업장 구석에 쌓아뒀던 작품들을 30년 만에 꺼내 보니 그간 잘 발효됐다”며 “밑작업을 잘해서 그림들이 숨을 쉴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뿌듯해했다.

수행과도 같은 자기 절제와 온축, 준비와 기다림이 필요한 작업을 지속하는 이 화백의 삶 또한 구도자 같다. 천주교 신자인 그는 오전 6시에 일어나 묵상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하루 한 시간가량 글씨를 쓰고, 책을 읽는다. 서예가가 글씨를 쓰기 전에 먹을 갈듯, 그는 이렇게 작품을 위해 스스로 준비하고 다진다. 올해 한국 나이로 여든이 된 그는 “귀가 좀 안 들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림을 못 그리겠느냐. 죽을 때까지 내 마음대로 재미있게 그릴 것”이라고 노익장을 과시했다. 전시는 다음달 3일까지.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