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한밤마을 돌담옛길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한밤마을 돌담옛길
산이 깊고 물이 맑은 경북 군위군에는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마을이 있다. 옛 감성 가득한 간이역과 영화 속에 나오는 작고 아름다운 마을도 있다. 답답한 비대면 생활이 계속되고 있지만 보석 같이 숨겨진 경북의 작은 마을에서 깊은숨을 쉬어 보면 어떨까.

돌담의 정취 가득한 한밤마을

군위군 부계면에 있는 한밤마을은 봄에는 노란 산수유, 가을에는 붉은 단풍이 돌담을 따라 이어지는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마을이다. 한밤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마을의 상징인 돌담을 모티브로 한 조형물이 우뚝 솟아있다. 조형물을 통과하면 솔향 가득한 숲길이 운치 있다. 부림홍씨 집성촌인 한밤마을은 고려 중기 재상을 지낸 홍란이라는 선비가 이주해 오면서 마을 이름을 대야(大夜)라 불렀으나 이후 밤 야(夜)자 대신 대율로 고쳐 부르면서 대율리 한밤마을로 불리게 됐다. 마을 집터를 닦을 때 땅속에서 파낸 많은 돌로 땅의 경계를 삼았는데, 그것이 돌담의 시초다.

오랜 세월의 더께가 쌓인 고택이 그대로 남아 있는 마을은 집집마다 돌담이 둘러 있어 마치 제주를 걷는 듯한 기분이 든다. 미로 같은 골목으로 들어서면 돌담에 엉킨 덩굴 잎사귀들만 반길 뿐 사방이 고요하다. 4㎞의 돌담으로 이어진 마을은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이면 다 돌아볼 수 있다. 마을 안에는 고택 사이에 넓게 자리 잡은 대청이 있다. 군위 대율리 대청은 조선 전기에 건립됐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 인조 10년(1632)에 다시 지은 학사(學舍)로 효종 2년(1651)과 숙종 32년(1705)에 중수됐다가 1992년에 완전해체하고 보수됐다. 수백 년 역사를 지닌 문화재는 전통가옥 한가운데 자리 잡아 마을 사랑방처럼 지나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대청 근처에 있는 350년 세월을 지켜온 남천고택과 옛집들이 고색창연하다. 군위에서 가장 오래된 남천고택에서는 고즈넉한 하룻밤을 보낼 수도 있다.

옛 모습 간직한 소박한 화본역

영화 속에 나올법한 작은 간이역 화본역은 군위군 산성면 화본리에 있다. 1936년 완공해 1938년 2월 1일부터 기차가 출발했다. 산성면에 시장이 없어 영천에 오일장이 서면 열차 안은 장터를 오가는 사람들로 와글와글했다. 화본역은 산성면 주민에게 생활의 터전이기도 했다. 지금은 하루에 상행 3회, 하행 3회 총 6회의 열차가 정차한다. 1936년 화본역의 옛 모습을 그대로 살리면서 네티즌이 뽑은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입장권을 끊어 작은 역사 안에 들어가 철길을 건너면 푸른 논이 넓게 펼쳐진다. 논 앞으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면 1899년부터 1967년까지 철길을 달리던 증기기관차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증기기관차에 동력이 되는 물을 대던 급수탑이 솟아있다. 1930년대 말에 지어진 화본역 급수탑은 높이 25m로 내부에는 파이프 관과 환기구가 그대로 남아 있다. 오랜 세월이 묻은 탑의 벽에는 ‘석탄정돈, 석탄절약’이라는 옛 문구와 낙서가 쓰여 있고 담쟁이덩굴이 감싸고 있어 운치를 더한다. 화본역과 급수탑은 그림같이 어우러져 여행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화본마을의 명물로 남아 있다.

레트로 감성을 따라 ‘엄마아빠어렸을적에’

화본역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엄마아빠어렸을적에’는 1970~1980년대의 추억이 담긴 박물관이다. 폐교된 산성중학교에 엄마 아빠가 어렸을 적 사용했던 물건들과 옛날 교실, 생활사 박물관, 오락실, 시골 찻집, 사진관, 시골 가게 등을 그대로 재현해 놓아 박물관을 천천히 돌아보면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도자기체험, 석고공예체험, 쿠키만들기 체험, 달고나만들기 체험도 할 수 있고 사격장, 에어바운스, 사륜자전거, 꼬마기차 등을 이용할 수 있어 가족과 함께 한나절을 보내기에 더할 나위 없다.

영화 ‘리틀포레스트’ 촬영지(혜원의 집)

군위군 우보면 미성리 리틀포레스트 촬영지
군위군 우보면 미성리 리틀포레스트 촬영지
'리틀포레스트' 김태리처럼…고즈넉한 경북 군위를 거닐다
군위군 우보면 미성리는 군위군에서도 2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다. 첩첩 시골 마을까지 많은 이가 찾는 이유는 이 마을이 소박한 음식 이야기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를 담아낸 김태리 주연의 영화 ‘리틀포레스트’의 배경이 됐기 때문이다. 한여름 푸른 논을 지나 작은 내를 건너면 수수한 한옥이 보인다. 영화 속에서 김태리가 머물렀던 곳이다.

영화는 집밥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하고 뜻대로 되지 않던 도시 생활에 지친 혜원이 고향에 돌아와 마당에서 직접 뽑은 재료로 밥을 짓고 심지어 떡과 술까지 빚어내는 장면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마을 풍경에 반한 관광객의 발길이 끝없이 이어지는 혜원의 집은 소란스럽다. 마당에는 혜원이 마을을 누볐던 자전거가 놓여 있다. 소복한 눈이 내리는 겨울날 곶감을 만들기 위해 처마에 감을 대롱대롱 매달아 놓은 장면을 재현해 놓은 감 모형도 정겹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 아담한 거실과 다양한 요리를 만들어낸 작은 부엌도 영화 속 풍경 그대로다. 대문을 나와 코스모스 한들한들한 오솔길을 바라보니 혜원이 자전거를 타고 미소 가득 머금은 얼굴로 달려올 것만 같다.

군위=글·사진 이솔 여행작가 leesoltou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