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라이 영화에서 옛 일본 무사들은 주군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초개처럼 가볍게 여기고 명예를 중시해 포로로 붙잡혀 이름을 더럽히기보다는 기꺼이 할복을 택하는 것으로 미화되기 일쑤다.
일본은 예로부터 무사들이 지배하는 '무(武)의 나라'였고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일본 기업들의 저력은 현대에까지 이어진 무사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일본 무사 연구의 대가 다카하시 마사아키(高橋昌明) 고베대학 명예교수는 2018년 처음 출간된 '사무라이의 역사(원제 武士の日本史)'에서 일본이 무사의 나라라고 할 수 있었던 시기는 길지 않았고 역사에 등장하는 무사나 무사도에 관한 묘사에는 과장, 왜곡이 많다고 지적한다.
무사가 등장해 하나의 계급을 형성하고 무신 정권인 막부의 주역으로 등장하기까지의 역사와 그들이 사용했던 무기, 그들이 참가했던 전투의 양상을 꼼꼼히 살피고 그들의 정신세계를 분석한 저자는 무사도가 국민도덕이나 일본인의 정신적인 배경인 것처럼 말하는 목소리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힌다.

사무라이의 직업적인 신분은 무사가 대부분이지만 문사도 일부 포함된다.
무사라는 말은 이미 나라 시대인 8세기 초부터 천황(일왕)의 조서 등에 등장한다.
그러나 가마쿠라 시대(1185~1333)까지 일본에서 의식적으로 '무'를 기피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무조건 긍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가 13세기 몽골의 일본 침공을 계기로 자국 우월 의식의 고조와 함께 '무'를 높이 평가하는 기록이 증가하고 16세기 들어 전국시대 통일 전쟁과 조선 침략 전쟁을 계기로 '무'에 의한 통치와 '무'에 뛰어난 국가로서의 자기상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고 저자는 풀이한다.
이 같은 관점은 가마쿠라 시대에 일찌감치 귀족으로부터 무가(武家)로 국가 정권의 중심이 옮겨갔고 그것이 그 후 700년에 걸쳐 계속됐다는 일본 역사학계 주류의 시각과는 큰 차이가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이런 역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일본인들이 어른이 돼서도 그러한 역사관에 겹겹이 둘러싸여 옳고 그름을 따질 기회조차 얻지 못하니 일본을 무국(武國), 무사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라고 저자는 꼬집는다.
일본은 조선 침략 전쟁이 끝나고 성립된 에도 시대에 들어서 비로소 무국으로서의 자화상을 확립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때부터 일본은 전쟁이 없는 시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무국이란 말뿐이었다.
당대와 후대에 널리 전승된 무사에 대한 기술에도 오류가 많다.
영화나 TV 드라마에는 기마무사 집단이 용맹하게 질주하는 모습이 곧잘 나오지만, 조랑말 크기에 불과했던 당시 전마(戰馬)로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다.
무사가 마상에서 칼을 휘두르는 장면도 허구에 불과하며 기마병의 주력 병기는 활과 화살이었고 기록상 사상의 원인도 화살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허명 속에 명맥을 유지하던 무사와 무사도는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고 군국주의 체제를 정비한 뒤 대외 침략을 개시하면서 되살아난다.
이 시기에 식민학자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1862~1933)가 쓴 책 '무사도, 일본의 혼'은 무사도를 서양의 기사도와 비교하면서 그 덕목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1900년 미국에서 먼저 영어로 출간됐고 이후 일본어로도 번역돼 일본 안팎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저자는 "애초에 니토베는 일본의 역사나 문화를 잘 알지 못했고 그가 주장하는 무사도는 부분적인 사실이나 습관, 논리·도덕의 단편을 쓸어 모아 머릿속에 있는 '무사' 상을 부풀려 만들어낸 일종의 창작"이라고 일축한다.
일본의 침략전쟁이 본격화하면서 무사 찬양은 점점 강도를 더해갔다.
특히 러일전쟁 승리 후 자부심이 극에 달한 일본에서는 '일본이 세계 최대의 육군국 러시아에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오로지 정신력'이라는 목소리가 커졌다.
정신력을 강조하는 흐름은 중일전쟁, 미국과 벌인 태평양 전쟁까지 이어졌으며 백병전의 효과를 맹신하고 포로가 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풍조를 낳았다.

이 같은 행태는 전략·전술적으로도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원래 일본 무사도가 지향하는 바도 아니다.
일본 무사 가운데 주류였던 '게라이(家礼)형'은 원칙적으로 무사가 기한제로 한정된 양의 봉사를 수행하고 거치 향배를 권리로 갖기 때문에 싸워서 이득 없는 상황에서 항복하는 것은 비난을 받아야만 하는 태도가 아니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사무라이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것처럼 주군의 복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무사는 이런 주종관계에서는 나올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일본이 정신력으로 강대국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저자는 "물질문명, 즉 생산력이나 과학기술력의 우열은 객관적인 것이다.
그러나 어떤 민족만이 특별하게 정신력이 뛰어나고 그 외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가 있는가"라고 꼬집는다.
저자는 무엇보다 무사와 무사도에 대한 찬양이 오늘날 일본에 가져올 수 있는 해악을 우려한다.
"패전 후 73년이 지나 정부 여당에 의해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인정하는 안전보장법안의 성립이 강행되고, 나아가 일본국헌법 9조의 개정에 그것 또는 그 이상의 내용이 포함되려는 정치 상황 속에서, 무사도가 국민도덕이나 일본인의 정신적 배경인 것처럼 말하는 목소리가 있다.
필자는 반대이다.
근세의 무사도는 무사사회 내의, 게다가 일부에서만 통용하는, 보편성을 가지지 않는 사상이며, 근대의 무사도는 에릭 홉스봄 등이 말하는 '만들어진 전통'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대일본제국의 시대에서조차 모든 시기 모든 일본인을 구속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
박영철 옮김. 240쪽. 2만7천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