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주(왼쪽부터) 이혁 박혜영 최은비가 한경갤러리 초대전 ‘표상의 세계’에 전시된 박혜영의 ‘Southern Barrens’ 앞에 모였다.  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나성주(왼쪽부터) 이혁 박혜영 최은비가 한경갤러리 초대전 ‘표상의 세계’에 전시된 박혜영의 ‘Southern Barrens’ 앞에 모였다. 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화가 나성주(35)는 마른미역을 대량으로 자주 구입한다. 동네 마트에서 파는 작은 봉지 미역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서다. 그는 물에 불린 미역을 작은 사각 틀에 넣어 큐브 형태로 말린다. 여기에 스프레이로 색을 뿌려 여섯 번을 채색한다. 초록, 연두, 보라, 노랑, 파랑, 자주, 하양 등 온갖 색을 입은 큐브들은 캔버스에 부착돼 모자이크처럼 독특한 색면을 형성한다. 미역으로 만든 입체회화라니….

나성주를 비롯해 독특한 작품 세계를 만들고 있는 젊은 작가 네 명이 뭉쳤다.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 1층 한경갤러리에서 20일 열리는 박혜영·이혁·최은비·나성주 초대전 ‘표상의 세계’에서다. 풍경, 인물, 추상 등의 회화작품 29점을 걸었다.

홍익대 미술대학원 동문인 이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표상으로 가득하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표상이란 ‘감각에 의해 획득한 현상이 마음속에서 재생된 것’이다. 어릴 적 무의식적으로 골랐던 크레파스, 벽지에 부모님 몰래 했던 낙서, 바닥에 여기저기 어질러진 붓과 물감들…. 이 모든 것이 자신들을 표상의 세계로 이끌었다는 것.

박혜영(30)은 컴퓨터 게임 속에서 찾은 디지털 풍경에서, 나성주는 부조화 속에서 발견한 조화로움에서, 최은비(28)는 재료의 물성을 통해 예상치 못하게 나타난 형태에서, 탈북민인 이혁(32)은 북한에서 남한으로 이주하면서 겪은 감정선에서 표상의 이미지를 발견했다. 네 명이 추구하는 표상이 저마다 독특하다.
화가 나성주가 한경갤러리에 전시된 자신의 'Collective dice' 시리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화가 나성주가 한경갤러리에 전시된 자신의 'Collective dice' 시리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나성주의 작업은 수행(修行)에 가깝다. 불린 미역을 큐브 형태로 말리는 데 3일, 스프레이로 채색해서 말리는 데 하루가 걸린다고 한다. 이런 큐브가 소품에는 100개 이상, 큰 작품에는 수천 개씩 필요하다. 손으로 큐브를 만들고 칠하는 반복의 과정이 끝없는 인내를 요구한다. 그는 “유기물과 무기물이 혼합된 작업은 ‘부조화의 조화’를 주제로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 간 갈등과 부조화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조화와 화합을 추구한다”고 설명했다.
화가 박혜영이 한경갤러리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 'Southern Barrens'를 살펴보고 있다.
화가 박혜영이 한경갤러리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 'Southern Barrens'를 살펴보고 있다.
박혜영은 부서진 형상을 합쳐 새로운 형상을 그리는 데 몰두한다. 디지털 세대답게 유동적이고 개인적이며 복합적인 디지털 세계를 픽셀 같은 점으로 그려낸다. 이번에 건 100호 크기의 ‘Southern Barrens’는 추상과 구상의 경계선에 있는 듯하다. 이런 작업을 통해 그가 주목하는 것은 가상과 현실이 뒤섞인 복합성이다. 그는 “현대의 인간은 가상 공간에서 스스로 정체성을 만들 수 있으며 물리적 현실 세계와 일체가 될 수도 있고 완전히 분리되기도 한다”며 “아무것도 전달되지 않고, 누구에게도 솔직해지지 않는 태도로 이미지를 부숴내고 흐트러뜨리고, 다시 합친다”고 했다.
화가 최은비가 한경갤러리에 전시된 자신의 추상 작품 'Pop! Pop!' 앞에서 작업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화가 최은비가 한경갤러리에 전시된 자신의 추상 작품 'Pop! Pop!' 앞에서 작업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Fingers Crossed’ 등 추상화 9점을 출품한 최은비는 스케치 없이 즉각적·감각적으로 작업한다. 속필로 그린 듯한 붓질의 흔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런 까닭에 붓 터치의 흔적을 중시한다. 때로 캔버스에 물감을 들이붓거나 던지기도 한다는 그는 “재료의 물성과 효과, 우연, 예상하지 못한 것들에 매료된다”고 했다.
이혁은 평안남도가 고향인 새터민이다. 전문예술인 양성을 위한 예술학교를 5학년까지 다닌 뒤 탈북했다. 다시는 미술을 하지 않겠다며 한국외국어대 영어과를 졸업했지만 홍익대 미술대학원에 진학했다. “결국 나는 미술쟁이라는 걸 절감했다”는 그는 “이젠 다른 곳을 기웃거릴 여유가 없다”고 했다.
흰색, 검은색, 붉은색으로 작품을 완성하는 이혁의 그림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붉은색이다. 갈비뼈가 앙상한 개의 불안한 모습을 그린 ‘자화상’의 그림자는 붉은색이다. ‘자작나무 숲’에는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식사를 위해 모인 가족을 그린 ‘반상(어머니를 생각하며)’에서는 붉은색 동그라미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붉은색은 나를 공포로 지배하는 색이자 폭력의 기억”이라고 했다. 이어 “캔버스는 나의 감정을 쏟아내는 그릇”이라며 “빛과 어둠, 기쁨과 슬픔 등 상반되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존재의 모호함을 그리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오는 8월 13일까지.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