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모델링 공사를 마치고 최근 새로운 모습으로 개장한 서울 고속버스 터미널이 매표소 표기를 영문으로만 했다가 비판이 일자 한글을 함께 쓰는 방향으로 바꾼 것이 대표적 사례.
서울 고속버스 터미널은 내부 리모델링을 마치고 지난달 재개장하면서 매표소 창구와 무인발매기 상단에 영문으로 'Tickets'라고만 표기했다.
한글 표기 없이 영문으로만 매표소임을 써놓은 사진이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서 공유되며 비판이 일었다.
그러자 터미널은 이달 초 '표 사는 곳', '무인발권기'라는 한글 표기를 추가했다.
지난 3일 터미널을 찾은 이종락(80)씨는 "터미널 안에서 한국어만 간신히 찾아다니며 걸었다.
매표소도 영어 대신 한국어가 더 크게 적혀 있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리모델링 공사를 담당한 신세계 센트럴시티 관계자는 12일 연합뉴스에 "한국어 대신 영어를 크게 표시한 것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면서도 "이용객의 다양한 의견을 검토해 한글 크기 확대 등 추가적인 조치를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서울시가 도입한 신형 버스 하차 벨도 터미널처럼 남녀노소 모두가 이용하는 공공시설물이지만 한글 표기를 생략했다가 비판을 받은 경우다.
일부 신형 버스의 하차 벨에 알파벳으로 'STOP'이라고만 표기된 데 대해 비판이 제기됐지만 한글 표기가 되지 않은 하차 벨을 부착한 차량이 여전히 서울 시내를 운행 중이다.
서울시 버스정책과 운행관리팀 관계자는 "한글 스티커를 시가 제작해서 버스 운수회사에 배부하고 부착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내겠다"고 밝혔다.
공공장소나 시설물은 아니지만 최근에 영문으로만 상호나 상품명을 표기하는 사례는 워낙 빈번해서 일반적인 일처럼 돼버렸다.
트위터 이용자 'brow*****'는 서울 여의도의 한 복합 쇼핑몰 입점 업체들이 간판에 영어를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쇼핑몰 내) 간판 80∼90%가 영어로만 돼 있었다.
젊은 층이 많은 쇼핑몰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심하지 싶다"며 "젊은 층이 더 많이 사용하는 인터넷 검색창에서 '메리 크리스마스 영어로'가 검색어 순위에 오르는 한국에서 이 무슨 코미디인가"라고 꼬집은 것. 젊은 층조차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실생활에 사용되는 영문 표기가 지나치게 많다는 지적이다.
매장 전면에 문구, 잡화를 뜻하는 'Stationery·Fancy Goods' 등을 한글 병기 없이 써놔 누리꾼의 비판 대상에 오른 서점 관계자는 "영어 간판은 단지 인테리어 연출용일 뿐 다른 이유는 없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특별한 사유'에 대한 해석이 워낙 느슨해 실질적인 규제는 이뤄지지 않는 실정이다.
행정안전부 생활공간정책과 관계자는 "자국어를 중시하자는 취지에서 시행되는 것으로, 실질적인 처벌을 염두에 둔 시행령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전통 경관의 보존을 위해 스타벅스 같은 외국 기업도 한글 간판을 단 인사동조차 최근에는 영문 간판의 범람에서 예외가 되지 못한다.
인사동길 초입에서부터 영문 단독 표기된 문구점 간판을 시작으로 10여 곳이 한글 병행 표기가 없는 영문 간판을 내걸고 영업하고 있었다.
서울 종로구청 도시디자인과 관계자는 "인사동이라고 해서 간판에 한글 사용이 강제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 "인사동 문화지구 내 5㎡ 이상 크기의 간판은 한글을 최소 20% 이상 써야 한다는 종로구 자체 심의 기준이 있긴 하지만 한글을 쓰도록 유도하는 것일 뿐 회사 로고 자체가 영어여서 어쩔 수 없는 경우까지 규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국내에서 다른 국가의 문자를 더 크게 적고 정작 한글은 작게 적는다는 것은 정상적이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서울대학교 영어교육과에 출강하는 응용언어학자 김성우씨 역시 "정보성보다는 영어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에 집중한 것으로 더 세련되고 진보적이면서 국제적으로 보이려는 의도가 있다"며 "주변에 영어 간판이 점점 많아지면 본인도 모르게 영어로 간판을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 일종의 '또래 압력'의 결과로도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국내에서 영어 사용 자체가 많아지는 것을 의도적으로 막기는 힘들지만 이와 별개로 내가 디자인한 간판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정보를 제공하는지를 생각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