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추상화의 선구자 김환기 화백(1913~1974)이 의학박사 김마태 씨를 처음 만난 건 1950년 부산 피란 시절 광복동 커피숍에서였다. 소설가 김말봉의 딸 전재금과 약혼한 사이였던 그를 우연히 길에서 다시 마주치면서 우정이 싹텄다. 1953년 김씨가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떠나자 김 화백은 프랑스 파리에 머물며 유럽 화단의 경향을 살폈다. 1959년 서울로 돌아온 김 화백은 현대미술의 1번지 뉴욕 진출의 의지를 다졌다.
1972년 김환기 화백이 뉴욕에 사는 김마태 씨 집에 걸린 ‘우주’ 앞에 앉아 있는 모습. /환기재단·환기미술관 제공
1972년 김환기 화백이 뉴욕에 사는 김마태 씨 집에 걸린 ‘우주’ 앞에 앉아 있는 모습. /환기재단·환기미술관 제공
1963년 10월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가해 명예상을 받은 뒤 곧바로 뉴욕으로 향했다. 김씨가 비행기 표를 구해주며 뉴욕 진출을 권유한 게 큰 힘이 됐다. 이듬해 김 화백의 부인(김향안)이 합류할 때도 항공권 비용을 김씨가 지원했다. 뉴욕에 안주한 김 화백은 다시 그림을 시작한다는 각오로 추상표현주의 대가 마크 로스코 등과 경쟁하며 예술세계의 혁신에 채찍을 가했다.

1974년 뉴욕에서 뇌출혈로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그는 김씨의 후원을 받으며 치열한 예술혼을 불태웠다. 머나먼 이국땅 뉴욕에서의 돈독한 우정과 대찬 열정은 모노크롬(단색화) 형태의 독특한 점화로 태어났다.

김환기 추상화 중 가장 큰 작품

뉴욕 시절 김환기 추상예술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대형 점화가 국내 미술품 최고가 기록 경신에 나선다. 김 화백의 1971년 작 ‘우주, 5IV-71 #200’이 이달 23일 미술품 경매회사 크리스티의 홍콩 경매에 추정가 73억~95억원으로 출품됐다. 전국 공동주택 최고가를 기록한 서울 한남동 244㎡ 펜트하우스 한남 더힐(84억원)과 맞먹는 가격이다. 김 화백 추상화 가운데 가장 큰 작품으로 알려진 ‘우주’는 푸른색 점들이 세로 254㎝, 가로 254㎝의 화면을 꽉 채우고 있는 득의작(得意作)이다. 수만 개의 푸른 점들이 마치 거대한 우주를 파고드는 밤하늘의 별처럼 규칙적으로 율동한다. 동양적 서정과 시적인 패턴을 통해 점화에서 구현하고자 한 김 화백의 초월적 특질을 가장 명백하게 보여준다. 당시 뉴욕 포인덱스터갤러리 개인전에 출품해 뉴요커들의 주목을 받았고, 김씨가 구입해 40년 이상 소장해왔다.

이학준 크리스티코리아 대표는 “무한한 우주공간의 본질을 파고들며 자신의 예술사상과 미학의 집대성을 위해 헌신한 김 화백의 열정이 느껴지는 작품”이라며 “최근 ‘환기블루’의 대표작 ‘우주’의 작품 소장 이력과 전시 이력을 담은 도록을 출간했다”고 말했다.

65억→71억→85억…김환기 그림값 이번엔 100억 넘을까
침체된 미술시장에서 독주 행진

미술 경기 둔화에도 불구하고 김 화백 작품에 대한 국내외 미술 애호가들의 ‘식탐’에 그림값은 하루가 다르게 오르며 신기록을 쏟아내고 있다. ‘큰손’ 컬렉터들은 올 상반기 서울과 홍콩 경매시장에서 김 화백 작품 88점을 사들이는 데 145억원을 쏟아부었다. 국내 상반기 전체 경매시장(826억원)의 17%에 달하는 액수다. 작년에는 253억원을 ‘베팅’했다. 최근 3년 새 40억원 이상의 초고가 작품도 일곱 점이나 탄생했다. 작년 5월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그의 붉은색 점화 ‘3-II-72 #220’이 85억원을 부른 응찰자에게 팔려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을 썼다. 지난 4월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도 1971년 작품 분홍색 점화 ‘무제’가 응찰자들의 경합 끝에 71억원에 낙찰됐다. 점화 ‘고요, 5-Ⅳ-73 #310’(65억5000만원), 노란색 점화 ‘12-V-70 #172’(63억원) 등도 초고가에 거래되며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 ‘톱5’를 싹쓸이했다.

1970년대 김 화백이 그린 점화가 시장에서 초고가에 거래되는 이유는 뭘까. 미술전문가들은 동양정신에 바탕을 둔 긍정적인 숭고 미학을 표방해 한민족의 성정을 독특한 기법으로 그렸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분석했다. 국제 미술시장에서 한국 대표작가 김 화백의 점화가 아직 저평가돼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중국 추상화 거장 자오우키의 트립티크(Triptyque·750억원)에 비하면 김 화백의 작품 최고가(85억원)는 9분의 1 수준이기 때문이다. 노승진 노화랑 대표는 “해외 컬렉터들이 김 화백 작품에 관심을 보이고 있어 우리 경제 규모에 맞게 추가 상승할 여지가 있다”며 “파리와 뉴욕을 중심으로 평생 성실한 작가로 일관한 삶과 예술이 감동을 주기 때문에 조만간 ‘1000만달러 작가’ 대열에 낄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