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의 보석 봉화 이야기
아름다운 전통문화유적지 (3)

1000명 왜군 섬멸의 기록 임란의병전적비

선조 25년 임진년(1592) 8월 22일 새벽, 왜군의 무리가 소천면 고선리 황평과 잔대미 마을을 거쳐 현동천으로 내려왔다. 또 다른 무리는 높은 고개 늦재를 넘고 황평에서 중리와 고선천을 건너 산 능선을 따라 화장산으로 향했다. 적의 퇴로를 알아챈 류종개 대장과 의병 600명은 적의 대열이 모두 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제히 공격해 1000여 명의 왜군을 멸했다. 의병들은 당시 활, 창, 칼, 도끼 같은 재래식 무기로 조총 같은 새로운 무기로 무장한 3600여 명의 왜군을 상대했다. 이 첫 전투에서 승전보를 울렸다.
왜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찾아왔다. 수적으로나 무기로나 열세에 놓였던 류종개 장군과 600명 의병은 봉화의 깊은 골짜기와 높은 봉우리에서 힘겨운 전투를 벌이다 모두 전사했다. 치열했던 소천 전투에서 1600여 명의 병력을 잃은 왜군은 봉화, 안동 내륙으로 진군을 포기하고 울진, 영덕으로 철수했다. 경상북도를 장악하려는 왜군의 뜻은 좌절되고 봉화는 안정을 되찾았다. 당시 핏빛으로 물들었던 소천의 수려한 산세와 그 앞을 흐르는 맑은 물에는 의병들의 숭고한 정신이 흐르고 있다.
봉화읍 송록서원과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파리장서(巴里長書)는 1919년 3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만국 평화회의에 심산 김창숙 선생을 중심으로 지방 유림의 상징이었던 면우 곽종석 선생과 유림대표 137명이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보낸 호소문이었다.
올곧은 선비의 마을 봉화에서도 많은 유림이 독립운동을 했다. 해저리 만회고택에서 심산 김창숙이 파리장서의 초안을 작성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봉화읍 유곡리의 안동권씨 문중에서 권명섭 선생을 비롯한 6명의 선생과 봉화읍 해저리의 의성김씨 문중의 김건영 선생을 비롯한 3명의 선생, 모두 9명이 파리장서에 서명했다. 이들의 뜻은 다음해 제2차 장서(長書) 추진과 1925년부터 이듬해까지 펼쳐진 제2차 유림단 의거로 이어져 유림이 앞장선 항일투쟁의 장으로 타올랐다.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에는 파리장서 독립운동의 취지문과 파리장서에 서명한 봉화 유림의 공적이 새겨져 있다.
재산면 동면리 마애비로자나불 입상

커다란 암벽에 새겨진 불상은 둥근 얼굴에 두 귀가 길게 늘어져 어깨까지 닿는다. 불상의 광배와 단순한 선이 흐르는 옷 주름, 둥근 신체와 얼굴, 다소 경직된 얼굴의 표현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퇴계 이황이 쓴 상운면 야옹정
상운면 구천리에 있는 야옹정은 야옹 전응방이 조선 선조 때 세운 정자다. 전응방은 중종 때 진사에 급제했으나 단종 때 왕위를 빼앗는 추악한 일들을 겪었던 할아버지 휴계 전희철의 유언에 따라 관직을 버렸다. 벼슬하지 않고 산이 깊고 맑은 물이 흐르는 봉화의 끝자락에 정자를 세워 도덕과 학문을 수련했다.
전응방은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야옹정에서 퇴계 이황과 도학을 논했다. 매년 강원 영월에 있는 단종의 능에 찾아가 도포 자락에 흙을 담아 능 위에 올리고 예를 갖춰 절했다. 그의 충성심처럼 팔작지붕이 당당하게 펼쳐진 정자에는 퇴계 이황이 직접 쓴 현판, 야옹정(野翁亭)이 걸려 있다.
봉화=글·사진 이솔 여행작가 leesoltou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