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박상숙 씨(68)는 1995년 어느 날 갑자기 프랑스 파리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김세중 청년조각상을 비롯해 석주미술상, 토탈미술관장상을 휩쓸며 역량을 인정받던 때였다. 남편(조각가 윤성진)도 선뜻 동의해 줬다. 한 달 반 만에 짐을 꾸려 파리 근교 보쉬르센에 둥지를 틀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시작한 파리 생활이었다. 작가는 나무나 돌은 물론 알루미늄, 스테인리스 등 새로운 재료를 과감히 사용해 가옥의 안팎 풍경을 축조해 왔다. 세간살이 같은 여성의 내밀한 정감을 담아내면서 인간의 체온이 흐르는 행복의 거처를 철저히 파고들었다. ‘조각의 집’이라는 일관된 주제에 천착한 그의 열정은 파리 미술계에서도 서서히 인정받기 시작했다. 2003년 한국과 프랑스 문화 교류를 위해 파리 블로뉴 숲 아클리마다시옹 공원에 조성된 ‘서울공원’에서 연 작품전은 혁신적 조형 어법이란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조각가 박상숙 씨가 서울 현대화랑에 전시된 스테인리스 스틸 조각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각가 박상숙 씨가 서울 현대화랑에 전시된 스테인리스 스틸 조각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21년 만에 현대화랑 개인전

지난 3일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개막한 박씨의 개인전은 이국땅 파리에서 20여 년간 고집과 끈기로 건져 올린 체험을 조각 언어로 바꿔 많은 사람과 소통하는 마음을 담았다. 전시장 건물 외부에 설치된 작품과 1, 2층을 채운 스테인리스 스틸 및 돌 조각 25점은 2010년 이후 인간과 생활 공간의 유착관계를 풀어낸 근작이다. 실루엣처럼 등장하는 인간 형상과 건축 구조물을 연상시키는 직선 형태의 초기 작품들과는 사뭇 다르다.

박씨는 “1998년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을 연 뒤 21년 만에 선보이는 전시”라며 “이번 출품작은 인간의 행복한 삶을 은유한다”고 설명했다. 집 내부의 소파, 의자, 기둥, 연통 같은 소재를 작품에 실어 모태적 공간으로의 회귀 본능을 자극하는 식이다. 그는 “집 안과 밖의 밝고 경쾌한 정감을 ‘행복’이라는 키워드로 조각에 차곡차곡 담아내고 흡수하는 일이 흥미롭다”며 미소지었다.

“집이란 물건이나 사물이 아니라 인간의 꿈을 보관하기 위해 발명된 공간입니다. 여성의 생활방식, 더 나아가 어머니라는 존재가 느껴지는 공간이기도 하고요.”

집의 안과 밖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양한 구조물을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한 ‘행복의 볼륨’ 시리즈는 단순한 외형으로서의 집, 건축물이 아니라 행복이 영그는 모성적 공간으로 치환한 조형물이다. ‘행복이야말로 집과 가정은 물론이고 인간의 역사를 떠받치는 최고의 정신적 지표’라는 점을 조형 언어로 되살려낸 작가의 촉수가 고스란히 살아 있다.

행복 변주한 스테인리스 스틸 조각

화랑 입구에 설치한 2m 넘는 대작은 팽팽하게 공기가 주입된 풍선을 스테인리스 스틸로 캐스팅한 듯한 곡선적 볼륨 형태로 제작했다. 사물을 반사하는 물질적 특성으로 작품 앞을 지나는 사람들과 주변 풍경을 압축적으로 담아낸다. 인간과 자연의 내밀한 조화를 이야기처럼 들려준다. 차가운 재료를 썼음에도 한껏 부풀어오른 ‘스뎅’ 조각에서는 온기가 느껴진다.

박씨는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이 바로 여기 있다는 사실을 스테인리스 스틸로 압축했다”며 “사람과 자연을 모두 품는 모습이 좋다”고 설명했다.

영국 조각가 앤서니 카로가 표방한 ‘조각의 회화주의’를 관통한 채색 작품들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스테인리스 스틸 조각에다 회화적 요소를 접목해 정통 조형문법에 신선한 변화를 준 게 이채롭다. 인간과 집에 대한 통찰이 묻어나는 ‘생활방식’ 연작들도 범상치 않다. 한국 전통가옥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온돌방과 구들장, 아궁이, 우물이 눈에 띈다. 작가는 “파리에서 우리 문화를 뼈저리게 그리워한 마음이 작품에도 표현된 것 같다”고 했다. 대리석과 골판지를 사용한 집 모형의 부조 작품에서는 소박한 가옥 이야기가 신비로운 분위기로 돌변하는 반전도 엿볼 수 있다.

박씨 작품의 핵심은 풍수지리와 같은 ‘감성의 명당’이어서 더욱 유별나다. 인간의 생활 공간과 행복 기원이란 가치가 결합해 나타나기 때문이다. 작가는 “한국에선 집을 지을 때 풍수지리를 중시한다”며 “이런 생각을 작품으로 발전시켰다”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25일까지.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