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이래 국토방위의 요충지로 전란이 있을 때마다 피난처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강화는 전 지역에 걸쳐 우리 민족의 가슴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지닌 곳이다. 특히 한반도 최대 국방유적지이며 호국의 성지가 강화도 해안가에 빼곡히 남아 있다.
강화의 대표적인 국방유적은 ‘5진(鎭) 7진보(鎭堡) 54돈대(墩臺)’다. 여기서 말하는 ‘돈대’란 외적의 침입이나 척후활동을 사전에 감시, 방어하고 관찰할 목적으로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에 흙이나 돌로 쌓은 소규모 최전방 초소이며 보(堡)란 진(鎭) 소속의 파견대가 주둔하는 최전방 요새로서, 각 보에는 몇 개의 돈대가 소속돼 있었다.
용진진은 선원면 지산리 216에 있으며 이조 효종 7년(1656)에 창설했다. 군관 24명, 사병 59명, 돈군 18명의 병력이 주둔했다고 한다.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포격전을 전개했던 곳이다. 포대 계단으로 내려가면 1867년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바다의 척화비라고도 불리는 방수경고비(防守警告碑)가 세워져 있다. 월곶진은 적북, 휴암, 월곶, 옥창 등 네 곳의 돈대를 관할했다. 병마첨절제사 1명, 군관 20명, 사병 87명, 돈군 20명이 배치됐다. 현재 이곳에는 연미정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보는 석양의 아름다움은 강화8경으로 알려져 있다.
또 진의 예하부대 진지라고 할 수 있는 7진보는 광성보를 비롯 선두보, 정포보, 장곶보, 인화보, 철곶보, 승천보 등이 있다.
광성보는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해안에 있으며 강화해협과 김포와 마주보고 있다. 1618년(조선 광해군 10년)에 외성을 보수하고 1656년 광성보를 설치했다. 이곳은 신미양요의 가장 격렬했던 격전지였다.
강화=김인완 기자 iy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