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시인 육사 이원록(1904~1944). 광음 매화 산맥 백마 등의 시어가 거친 움직임으로 덮쳐온다. ‘초인’ 앞에서는 숨이 멎을 것 같다. 내가 중학교 때 국어 교과서에서 어느 날 갑자기 맞닥뜨린 ‘광야’는 묵직했다. 거칠지만 아름답고, 황량하지만 빛이 났다. ‘광야’는 해방되던 해 12월 자유신문에 유고로 발표됐고, 우리 독립투쟁사에서 가장 울림이 큰 시가 됐다. 육사가 이 시를 쓴 것은 베이징의 일본 감옥에서였다. 고문과 폐병이라는 죽음의 문턱에서 마지막 에너지를 쏟아 써내려간 시다. 그곳은 베이징의 둥청구(東城區) 둥창후퉁(東廠胡同) 28호에 있는 2층 건물 지하다. 베이징 여행을 간다면 꼭 한 번 찾아가 볼만한 곳이다.
이육사가 순국한 베이징의 둥창후퉁 28호 대잡원
이육사가 순국한 베이징의 둥창후퉁 28호 대잡원
죽음의 끝에서 쓴 시 ‘광야’

둥창후퉁은 지하철 1호선 왕푸징역(王府井站)에서 북쪽으로 1.5㎞ 정도 거리다. 왕푸징 보행가에서 조금 더 걸어야 한다. 왕푸징대가(王府井大街)를 따라 걷다 보면 좌측 대로변에 서커보위안(社科博源)이란 8층 호텔 직전에 둥창후퉁 가로표지가 나타난다.

쓰레기와 잡초만 남은 둥창후퉁 28호 내부
쓰레기와 잡초만 남은 둥창후퉁 28호 내부
둥창후퉁으로 100m 정도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둥창후퉁 1호에 중국근대사연구소와 세계역사연구소가 있다. 100m 정도 더 들어가면 왼쪽에 28호가 있다. 둥창후퉁 28호는 여러 가구가 살고 있는 대잡원(大雜院)이다. 2층 벽돌 건물이 한 동 있는데, 사방으로 단층과 이층의 벽돌집이 둘러싼 구조다. 대부분 비어 있지만 일부는 사람이 살고 있다. 건물 안팎으로 쓰레기와 버려진 물건이 어지럽게 쌓여 있고 곳곳에 잡초도 적지 않다.

육사 이원록은 이곳에서 1944년 1월16일 새벽 고문 끝에 죽었다. 육사는 경성에서 체포돼 베이징으로 끌려왔다. 육사의 죽음은 단순히 옥사가 아니라 모진 고문 끝의 순국이었다. 이 감옥에 갇혀 ‘어떤 비밀’을 불지 않는 바람에 고문이란 지옥에 빠진 채 죽어가는 동안 ‘광야’와 ‘꽃’을 쓴 것이다. 죽음에 다다른 육사는 ‘광야’로 절규하고, ‘꽃’으로 동지들의 혼을 불렀다.

둥창이란 지명 자체가 죽음을 연상케 한다. 둥창후퉁은 명대에 동창(東廠)이 있었던 곳이다. 동창은 명대의 비밀경찰 조직으로 악명이 대단했다. 걸리면 죽음이랄까. 청조는 동창을 폐지했다. 일제는 1926년 이곳을 사들였고 1945년 패망 때까지 중국 문화침탈 전담기구인 동방문화사업위원회가 입주했다. 사무실 이외에 일부를 감옥으로 사용한 것이다.

유약한 문사 아니라 군사 역량까지 갖춘 투사

대잡원에 붙은 벽보
대잡원에 붙은 벽보
육사 이원록은 1904년 출생했고 1924년 20세에 1년 정도 일본에 유학했다. 귀국한 뒤 대구에서 사회활동을 했고 26세의 나이에 지면에 시를 처음으로 발표했다. 이즈음 기자 생활을 시작했으나 경찰서에 들락날락하는 일이 잦아졌다. 1931년 3개월 동안 만주를 다녀왔다. 허은(육사의 외사촌, 임시정부 국무령이었던 이상룡의 손부)의 회고에 따르면 육사의 외삼촌인 허규가 독립운동 자금을 운반하는 데 육사가 동행한 것 같다.

육사는 윤세주의 권유를 받고 1932년 난징으로 가서 김원봉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1기로 교육받았다. 윤세주는 김원봉의 의열단 창단 멤버였고, 의열단의 후신이자 정당조직으로 전환한 민족혁명당의 핵심이었고, 김원봉이 창설한 조선의용대의 심장이었다. 그러나 1942년 타이항산 지구에서 팔로군과 함께 일본군과 벌인 격렬한 전투에서 전사했다. 육사에게는 둘도 없는 동지였다. 그가 ‘꽃’에서 부른 동지는 바로 윤세주일 것이다.

육사는 1943년 4월 태평양전쟁으로 인한 전시체제와 강제동원이란 엄중한 상황에서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육사는 충칭으로 가서 누군가를 대동하고 옌안으로 가고, 다시 귀국할 때는 무기를 반입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1943년 늦가을 모친과 맏형의 제사에 참석하려고 귀국했다가 경성에서 체포돼 둥창후퉁의 지하 감옥으로 압송됐다.

육사는 문약한 시인이 아니었다. 그의 평문은 사회를 매섭고 냉철하게 분석했고, 적의 심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군사적 역량까지 갖춘 투사였다. 1943년의 베이징행은 죽음을 각오한 결단이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 조선에 대해서는 식민수탈의 고삐를 바짝 죄었다. 저명한 문인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일제의 꼭두각시가 돼 전국을 순회하며 태평양 전쟁 지원을 선동하고 있었던 시기다.

외삼촌 영향으로 항일 투쟁 최전선에

자유일보에 발표된 ‘광야’
자유일보에 발표된 ‘광야’
육사는 이런 친일매국의 격랑을 거슬러 항일투쟁 최전선인 중국 대륙으로 나아갔다.

허은은 육사가 외삼촌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회고했다. 육사의 외가는 독립운동 가문이다. 의병장 허위와 허형(육사의 외조부)은 물론 그 후손 대부분이 만주로 망명했다. 외삼촌 허규(1884~1957)는 왕산 허위의 의병투쟁에 형제들과 함께 가담했다가 왜경에 체포된 이후 수차례에 걸쳐 20년 가까이 감옥에서 고통을 당했다. 어머니의 사촌동생이지만 육사보다 5세 연하인 허형식(1909~1942)이란 존재도 큰 영향을 줬을 것이다. 허형식은 북만주에서 끝까지 소련으로 피신하지 않다가 일제 토벌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는 지금도 ‘북만주 최후의 파르티잔’이라 불린다. 허형식을 연구한 장세윤(동북아역사재단 한일관계연구소장)에 따르면 백마를 타고 온 초인은 허형식이다.

둥창후퉁 28호에서 다시 ‘광야’를 읽어보자. 그의 시는 피로나 무력감에서 나온 도피나 한탄이 아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죽음과 일제의 강탈에 맞서는 강력한 투사의 절규다.

둥창후퉁에는 또 하나의 고문치사가 있었다. 육사의 고향 후배 이원대(1911~1943, 건국훈장 독립장)가 육사보다 1년 앞서 이곳에서 순국했다. 육사는 이원대에게 김원봉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입교를 권했다. 이원대는 군정학교 졸업 후에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 지역에서 지하활동을 하다가 체포됐다. 베이징 둥창후퉁으로 압송된 이원대도 이곳에서 모진 고문 끝에 순국했다.

베이징=윤태옥 다큐멘터리 제작자 겸 작가 kimyt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