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색화 선구자’ 김기린 화백이 서울 갤러리 현대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 ‘안과 밖’을 설명하고 있다.
‘단색화 선구자’ 김기린 화백이 서울 갤러리 현대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 ‘안과 밖’을 설명하고 있다.
김기린 화백(80)은 대학 시절 러시아 절대주의 추상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에게 푹 빠졌다. 예술을 향유의 대상이 아니라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인식한 말레비치의 회화론이 마음에 와 닿았다. 한국외국어대 불어과를 졸업하고 1961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다종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그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파리 국립 고등미술학교와 조형미술학교에서 미술을 배워 모노크롬(단색화)에 매달렸다. 서구 미니멀리즘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동양의 여백과 자신의 의식 흐름을 단색화면에 담은 독창적인 작품으로 국내외 화단에서 주목받아왔다. 미술 인생 50년 동안 모노크롬이라는 한우물을 파온 그를 화단에선 ‘단색화의 선구자’로 부르는 이유다.

평생 단색화만을 고집해온 김 화백이 오는 27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개인전을 연다. 2008년 이후 6년 만에 여는 이번 개인전에는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던 1960~1970년대 작품을 중점적으로 소개하면서 2000년대 작품 일부를 내놔 그동안 작품세계가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10년을 주기로 작업에 변화를 시도해온 그는 궁극적으로 ‘본다’는 행위 자체를 시각언어로 형상화한다. 어린 시절 꾼 꿈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1960년대 작품은 단순한 색깔이라고 인식하기 쉬운 흑과 백을 오브제로 활용했다. 김 화백은 “빛을 흡수하는 성격을 갖고 있는 검은 색깔이 오히려 빛을 발산하고, 빛을 내는 속성을 가진 흰색은 반대로 빨아들이는 ‘색의 역전현상’을 연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1970년대에는 사각의 캔버스 안에 작은 사각형을 구성해 평면 모노크롬 작업을 심화시켰다.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내면에 숨어 있는 가치를 탐색하려는 현상학자 메를로 퐁티의 안과 밖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회화에 도입했다. 작품 제목도 퐁티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Visible, Invisible)》이란 책에서 따왔다. 수십 차례에 걸쳐 검은색 혹은 흰색 물감을 반복적으로 칠하고 점을 찍는 과정을 거쳐 작품이 완성된다. 수많은 점을 찍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에 편안함과 안정감을 주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서 점을 찍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색채 범위를 확장해 적색, 청색, 황색, 녹색, 갈색 등의 선명한 색채들을 사용해 원색의 미감을 살려냈다. 정교하게 계산해 그린 그리드(격자)가 드러나는 게 얼마 전까지의 작업이었지만 최근작은 더욱 단순해져 점만 남아 있다. 인상파 작품들의 색채가 빛을 드러내는 것이었다면 김 화백은 그 빛을 흡수해 어떤 ‘절대적인 색채’를 추구하고 있는 듯하다. 모노크롬 회화를 고집하면서 최대한 기름을 뺀 유화만 사용하는 것도 그의 특징이다.

“항상 유화만 사용합니다. 그래서 유화를 사용할 때 미리 신문지로 물감의 기름기를 걸러내는 특별한 과정을 거쳐서 캔버스 표면에 건조한 질감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하죠. 아크릴에서는 그만큼 깊이가 배어나지 않거든요.”

통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요즘도 멘델스존의 현악 사중주를 들으며 작업 삼매경에 빠져든다는 팔순의 노화백은 스님이 반복해서 독경하듯 수행자 같은 미학에 꽂혀 있다. 그는 “그림 그릴 때 어떻게 하면 내가 지닌 순수한 마음과 정신을 가장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김 화백은 내년 2월 미국 뉴욕의 리만 머핀 갤러리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02)2287-350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