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영업정지로 셔터가 내려진 미래저축은행 잠실지점.
2012년 5월 영업정지로 셔터가 내려진 미래저축은행 잠실지점.
2012년 5월 6일 한국경제신문 1면 머리기사는 미래저축은행의 김찬경 전 회장이 장식했다. 김 전 회장이 사흘 전 밤 9시쯤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궁평항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밀항하려다 경찰에 붙잡혔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김 전 회장은 미래저축은행의 영업정지가 예정되고 사법 당국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도피를 시도했다. 당시 그의 수중에는 시중은행에 넣어둔 회사 자금 200억 원이 있었다. 그로부터 2년이 흐른 지난해 8월 대법원은 김 회장에게 징역 8년을 선고했다.

김 회장의 도피 행각은 부실과 불법으로 무너져 가는 저축은행 업계의 민낯을 보여 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저축은행에 갖고 있었던 일말의 신뢰조차 완전히 무너져 버린 계기이기도 했다. 서민의 저금통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며 일반 은행을 위협하던 저축은행은 완전히 몰락했다. 2010년 말 자산 86조8000억 원을 기록하며 조만간 100조 원을 넘기겠다고 호언장담하더니 올해 3월 말에는 39조6000억 원으로 급감했다. 2011년 1월 삼화저축은행의 영업정지를 시작으로 촉발된 이른바 ‘저축은행 사태’로 저축은행 업계는 ‘초토화’됐다. ‘악몽’ 같은 시간이었다.

솔로몬저축은행·현대스위스저축은행 등 업계 1위를 맛봤던 회사들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2010년 말 105개였던 저축은행은 대규모 인수·합병(M&A)의 소용돌이 속에 79개까지 줄어들었다. 개인 대주주 중심으로 운영됐던 상당수 저축은행들이 대형 금융지주, 증권회사, 대부 업체, 일본계 금융회사들의 자회사로 하나둘 재편됐다.

고도성장기에 ‘땅 짚고 헤엄치기’

저축은행은 1972년 상호신용금고법이 제정되면서 탄생했다. 30년간 상호신용금고로 불리다가 2002년 저축은행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저축은행이 나타나게 된 계기는 당시 시중은행들이 대기업을 중심으로 돈을 빌려 주면서 소상공인과 개인 사업자에 대한 금융 지원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저축은행법(제1조)에는 저축은행의 목적을 ‘서민과 중소기업의 금융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라고 명시하고 있다.

태동기에는 다소 어설펐지만 1980년 한국 경제가 고도성장기에 접어들면서 ‘전성시대’를 누렸다. 돈이 귀했던 시절이어서 영업은 땅 짚고 헤엄치기만큼 쉬웠다. 1980년 1조 원에도 못 미쳤던 자산이 1980년대 말 11조 원 이상으로 증가했다. 1997년 외환 위기와 1998년 시중은행의 여신금지제도 폐지(골프장·대형식당·사우나 등에도 대출을 허용)로 세가 크게 위축됐지만 저축은행 업계의 규제 완화 요구가 꾸준히 받아들여지면서 정상화됐다. 저축은행으로 불릴 수 있게 된 것도 규제 완화 덕분이다.

2000년 중반부터는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이 ‘황금 알을 낳는 거위’로 떠오르며 2차 전성기를 맞았다. PF 대출은 대출이 이뤄지는 시점의 부동산 가치를 따지지 않는다. 부동산 개발 이후, 예를 들어 아파트가 완공됐을 때의 땅의 가치를 계산해 대출 금액을 결정한다. 부동산 시장의 ‘불패 신화’가 이어지고 있던 시절이어서 돈을 떼이지 않고 큰 수익을 냈다. PF 대출의 수익률은 연 30%를 넘기기도 했다. 대형 은행들이 정식으로 부동산 개발 사업 대출을 해주기 전에 몇 개월간 자금을 융통해 주면서(브리지 대출) 이자는 이자대로 받고 10%가 넘는 취급 수수료를 떼어 가기도 했다. 2000년대 후반 업계 2위였던 솔로몬저축은행(현 우리금융저축은행)은 PF 대출의 비중이 절반을 차지했다. 여신액 2조 원 가운데 1조 원이 PF 대출이었다. 전체 저축은행 업계의 2010년 말 PF 대출은 17조4000억 원에 달했다.

‘승승장구’했던 PF 대출은 2008년 부동산 경기가 정점을 찍고 위축되자 속절없이 무너졌다. 망하는 원리는 간단하다. 지금은 1㎡당 50만 원의 가치가 있지만 아파트가 지어진다면 200만 원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해 100만 원을 빌려 줬다고 치자. 그런데 주택 경기가 악화하면서 아파트 공사가 중단된다. 그러면 담보로 잡은 땅을 팔아도 50만 원의 손해가 난다. PF 대출 비중이 많은 저축은행들은 이렇다 할 힘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저축은행들은 어떻게든 회사를 살려보기 위해 정치권 등에 구원의 손길을 요청했지만 누가 ‘뒷배’로 나서더라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대형 비리 스캔들을 만들어 냈다.

금융위원회는 2011년 1월 4일 삼화저축은행에 첫 영업정지 명령을 내렸다. 한 달여 뒤인 2월 17일 업계 1위 부산저축은행을 비롯해 그해 모두 15개 저축은행이 영업정지를 당했다. 2012년 5월 6일 일요일 새벽 6시에는 김찬경 전 회장의 미래저축은행을 포함해 당시 업계 1위 솔로몬저축은행·한국저축은행·한주저축은행 등 4곳에도 영업정지 철퇴를 내렸다. 2012년에도 모두 8개 저축은행이 문을 닫았다.

마지못해 저축은행 떠안은 금융사들

영업정지를 당한 대형 저축은행들을 인수한 회사들은 금융지주였다. KB금융지주는 제일저축은행(현 KB저축은행), 우리금융지주는 솔로몬저축은행(현 우리금융저축은행), 신한금융지주는 토마토저축은행(현 신한저축은행), 하나금융지주는 제일2저축은행·에이스저축은행(현 하나저축은행)을 가져갔다.

금융지주들은 저축은행 인수에 미온적이었다. 인수할 매력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고백이 여러 곳에서 흘러나왔다. 뭣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축은행 중에서는 자산 규모가 컸지만 수백조 원의 자산 규모를 자랑하는 금융지주들에 저축은행의 자산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골칫덩어리였다. 겨우 몇 백만 원을 빌려준 차주도 많았고 부동산 시장에 빌려 준 대출금을 회수하기도 만만치 않았다. 그동안 저축은행들의 영업 관행을 봤을 때 언제 어디서 ‘지뢰’가 터질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금융지주들은 기꺼이 저축은행을 한두 개씩 가져갔다. 금융권에서는 이를 두고 정부의 입김에 따른 ‘자의 반 타의 반’의 결정이었다고 평가한다. 저축은행들이 다시는 사고를 치지 못하게 정부가 금융지주들에 떠안겼다는 얘기다. 당시 금융위원장은 ‘영원한 대책 반장’이 별명인 김석동 위원장이었다. 김 위원장은 ‘관치금융’ 논란이 일자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 있다”고 대꾸할 정도로 정부의 역할을 강조했던 인물이었다. 업계에서는 ‘김 위원장이 칼을 잡았는데 어련했겠느냐’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 모 은행의 고위 관계자도 “금융회사는 정부로부터 미운 털이 박히지 않기 위해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정부의 압박 사실을 우회적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금융지주 자회사로 편입된 저축은행들이 상당 기간 문제를 만들지 않는 것이 잘하는 일이라며 ‘아무것도 안 하기’ 전략을 고수했던 것도 돈을 벌 생각보다 다른 배경이 있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2011년 9월 7개 저축은행의 영업정지를 발표하는 김석동 금융위원장.
2011년 9월 7개 저축은행의 영업정지를 발표하는 김석동 금융위원장.
사업적 판단에서 저축은행 인수를 시도했다고 평가받는 업계는 증권회사와 대부 업체들이었다. 현대증권이 2011년 11월 대영저축은행을 사들여 현대저축은행을 만들었고 대신증권은 중앙부산·부산2·도민저축은행을 인수해 대신저축은행을 세웠다. 키움저축은행은 키움증권이 삼신저축은행을 사서 만든 회사다. 증권회사 계열의 저축은행들은 주식 투자자를 위해 돈을 빌려 주겠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저축은행 인수에 가장 공격적이었던 업계는 대부 회사들이었다. 러시앤캐시로 유명한 대부 업계 1위 에이앤피파이낸셜그룹은 예주저축은행(구 서울저축은행)과 예나래저축은행(구 전일·대전·한주저축은행)을 인수했다. 금융 당국은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에이앤피파이낸셜그룹은 2개의 저축은행을 매입해 OK저축은행을 만들었다. 소액 대출 시장에서 쌓아 온 노하우를 저축은행에서 활용하면 사업성이 충분하다고 판단해서다. OK저축은행은 서울, 인천·경기, 광주·전라, 충청권 등 사실상 전국 단위의 영업망을 갖췄다. 저축은행의 영업 구역은 기본적으로 특정 지역 한 곳에 국한되지만 M&A가 이어지면서 여러 영업 구역을 갖게 됐다. 대부 업계 3위 웰컴크레디라인대부도 예신·해솔·서일저축은행을 인수해 웰컴저축은행을 출범시켰다. 역시 전국 영업을 할 수 있다.

저축은행 M&A 시장의 큰손은 일본계 금융회사도 포함된다. SBI(구 현대스위스1·2·3·4저축은행)·친애(구 미래저축은행)·조은(구 신민저축은행) 등 여덟 곳이 일본계로 넘어갔다. OK저축은행도 일본계 저축은행 가운데 하나다. 일본계 금융회사들은 일본에서 연 1~4%로 자금을 들여올 수 있어 한국 서민금융 시장에서 이익을 낼 여지가 크다. 일본계 금융회사들의 진입이 많아지면서 저축은행 업계 전체 자산에서 일본계가 차지하는 비율은 19%로 2012년 대비 6배나 늘었다.

일본계 SBI코리아홀딩스 업계 1위로

SBI코리아홀딩스가 대주주인 SBI저축은행의 자산은 4조원으로 독보적인 업계 1위다. 저축은행 업계에서는 SBI저축은행의 인수·합병(M&A)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내놓기도 한다. 구 현대스위스저축은행의 부실을 과소평가하고 인수에 참여했다는 이유에서다. SBI저축은행을 인수한 이후 투입한 금액은 1조3000억 원에 이른다. 농협금융지주가 우리투자증권과 우리아비바생명·우리금융저축은행을 한꺼번에 사들이면서 쓴 돈보다 많은 금액이다.

저축은행 업계의 몰락으로 바빠진 곳은 예금보험공사도 포함된다. 예보는 2011년부터 15개 저축은행을 인수했다. 예보는 인수한 저축은행의 부실을 정리해 가교 저축은행으로 만들었고 모두 새로운 주인을 찾아줬다. 예부·예나래·예솔·예신처럼 저축은행 이름 앞에 ‘예’가 붙은 저축은행은 모두 예보가 갖고 있었던 저축은행이었다. 예보는 저축은행 사태 뒤처리를 위해 투입한 자금은 27조1000억 원이며 이 가운데 9조7000억 원을 회수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에 따른 피해는 어떤 식으로든 정부 손실로 반영될 수밖에 없다.

M&A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렸던 저축은행 업계는 지난해 하반기에 들어서야 겨우 자리를 잡았다. 금융감독원은 2014 회계연도 3분기 누적(2014년 5월~2015년 3월) 당기순이익이 3443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8211억 원 늘었다고 지난 5월 발표했다. 2014 회계연도 당기순이익은 1분기에 80억 원으로 흑자 전환된 이후 2분기와 3분기에 각각 1600억 원을 넘었다. 연체율과 고정 이하 여신 비율(부실대출 비율)도 개선되고 있다.

저축은행 관계자는 “저축은행으로 큰돈을 벌 수 있는 길은 이제 없어졌지만 시중은행이 외면하는 소상공인과 개인 신용 대출 시장을 공략한다면 짭짤한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이라며 “지난 3년간 저축은행 업계에서 나타났던 M&A 시장이 다시 설 것으로 예상하기는 어렵지만 알짜 매물을 중심으로 꾸준한 손 바뀜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박종서 한국경제 기자 cosmos@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국경제매거진 한경 BUSINESS 1022호 제공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