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 ‘에코팜’에서 수강생들이 모종 재배 실습을 하고 있다.
포스코 ‘에코팜’에서 수강생들이 모종 재배 실습을 하고 있다.
33년간 포스코 포항제철소 제강부에서 뜨거운 쇳물과 씨름해온 정창호 씨(62). 2009년 은퇴한 후 2년간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그에게 포스코에서 반가운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농사를 한번 지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망설이던 그는 가족과 함께 포스코가 운영하는 ‘에코팜’에서 무료 귀농·귀촌 교육을 받았다. 4년 후 그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철을 만들어내던 그의 손은 이제 황토집을 짓고 벼와 콩, 감자와 고추 등 싱싱한 농작물을 길러낸다. 시내에 있던 집은 팔고 농장 인근에 전원주택도 마련했다.

은퇴 후에도 구직 전쟁에 뛰어든다는 ‘반퇴(半退) 시대’가 화두로 떠오르면서 철강회사 포스코의 은퇴설계 프로그램인 에코팜이 주목받고 있다. 에코팜은 포스코가 은퇴했거나 은퇴를 앞둔 전·현직 임직원을 대상으로 4년 전 시작한 귀농·귀촌 교육 프로그램이다. 강사비와 시설비 등 에코팜 운영에 드는 비용은 연 3억~4억원. KT, 삼성, 현대 등 다른 기업들도 전직 사우를 위한 은퇴 설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재취업 및 창업 컨설팅이라기보다는 재무관리 및 단기 워크숍에 그쳤다.
‘한옥목수 과정’을 수강중인 교육생들이 실습을 하고 있다. 포스코 제공
‘한옥목수 과정’을 수강중인 교육생들이 실습을 하고 있다. 포스코 제공
포스코는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 직원 중 다수가 은퇴 후 귀촌을 꿈꾼다는 점에 주목했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간 제철소 인근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사우들이 은퇴 후에도 행복한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줘야겠다는 사내 여론이 에코팜의 탄생 동기가 됐다. 포스코는 자회사 포스웰을 통해 2008년 3월 폐교된 포항시 북구 죽장면 죽장초등학교 죽북분교를 임차, 리모델링해 2011년 4월1일 에코팜의 문을 열었다.
딱딱한 이론 교육은 최소화하고 현장 실기 위주의 교육 시설을 지었다. 교육 프로그램은 △한옥목수 △구들시공 △전원생활 △천연염색 △소목공예 △과수재배 △산채·약초 등 귀농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과정으로 짰다. 강사진은 오경진 백운블루베리 대표, 이형재 수향농원 대표, 오정숙 매화랑매실이랑 대표 등 현업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수강생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씨앗을 뿌리는 것부터 재배한 농산물을 유통하는 과정까지 ‘원스톱’으로 배울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부부끼리, 가족끼리 주말마다 농장으로 몰려들었다. 포항 지역 수강생들로부터 입소문이 퍼지면서 이듬해 2월 광양시 금호동에도 2호 에코팜이 문을 열었다. 에코팜이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상부상조하는 문화도 생겨났다. 지역 네트워크가 다른 농촌보다 강하기 때문에 각각 재배한 농작물과 제조한 상품을 공동으로 유통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재배가 쉽고 신기술 개발이 활발한 블루베리, 매실 등이 인기 작물이다.

귀농 교육을 이수하다 아예 박사과정으로 옮겨 가는 수강생도 있다. 35년간 제철소 열연부에 근무하다 2년 전 퇴직한 조동옥 씨(61)는 블루베리 재배과정과 귀농·귀촌 과정 등을 이수한 뒤 현재 블루베리와 매실농장을 운영하면서 순천대 농업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