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임상연구센터에서 실험을 받고 있는 헨리 몰레이슨. 1953년 뇌 수술 후유증으로 수술 이후의 기억을 저장할 수 없게 된 그는 불행한 처지임에도 항상 밝은 모습으로 연구에 협조했다. 알마 제공
1990년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임상연구센터에서 실험을 받고 있는 헨리 몰레이슨. 1953년 뇌 수술 후유증으로 수술 이후의 기억을 저장할 수 없게 된 그는 불행한 처지임에도 항상 밝은 모습으로 연구에 협조했다. 알마 제공
‘인셉션’ ‘인터스텔라’ 등을 연출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출세작은 ‘메멘토’다. 자신의 아내가 살해당한 충격으로 사건 이후 시점부터 기억을 10분 이상 가질 수 없게 된 남자의 복수극이다. 주인공은 범인을 찾아 복수하기 위해 기억 대신 사진과 메모, 문신을 이용한다. 과거 특정 시점을 기억하지 못하는 일반적인 기억상실증과 달리 새로운 기억을 만들 수 없다는 설정은 영화팬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어제가 없는 남자, HM의 기억》은 이 영화의 주인공과 비슷한 실존 인물의 삶을 다룬 책이다. 1953년 간질 발작으로 고생하던 27세 남자 ‘HM’은 치료를 위해 뇌 조직 일부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측두엽을 제거하면 간질을 치료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뇌 속 해마의 대부분도 없앴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간질은 없어졌다. 하지만 그에게 새로운 기억을 갖지 못하는 엄청난 비극이 발생했다. 수술 이전의 일은 기억하지만 이후 일어난 일들은 거의 기억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의 이런 ‘순행성 기억상실증’은 학계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62년 뇌 인지과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이던 저자는 HM을 전담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저자를 비롯한 100여명의 과학자가 46년 동안 HM과 함께 수백 건의 연구를 진행했다. 이 연구를 통해 측두엽의 한 부위가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전환하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증거가 제시됐고, 기억이 몇 단계의 처리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기억은 서술기억과 비서술기억 두 종류로 나뉜다는 것, 기억할 수 없어도 학습을 통해 습관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주요한 연구 성과다.

HM과 수십 년을 함께한 저자는 “HM은 그저 교과서에 간략하게 쓰이는 익명의 존재로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며 “그는 결코 테스트 수행점수나 뇌 이미지로 다 설명되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HM에 대한 연구 기록과 성과, 삶을 담은 책을 쓰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다만 HM이 모든 실험을 기억하지 못해 수많은 실험을 새로운 것이라 생각했다 하더라도 연구진이 그를 괴롭힌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에게 했던 수많은 실험이 뇌과학의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한들 정작 그의 기억상실증을 치유하지는 못했다. 아무리 정상적이고 협조적인 사람도 수십 년 동안 수백 번의 실험에 참여하긴 어렵다. 기억을 30초 정도밖에 유지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매번 실험을 해야 한다는 상황 자체가 큰 위협이었을 수도 있다. HM이 뇌과학에 중요한 사례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느긋하고 타인에게 열린 마음을 가진 그의 천성 덕분이었다. HM과 비슷한 증상이 있어도 타인에게 공격적인 성향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실험은 불가능했다.

HM은 1926년에 태어나 2008년 삶을 마감했다. 그는 책의 원제처럼 50년 이상을 ‘영원한 현재 시제(permanent present tense)’로 살았던 ‘행복했거나 아니면 불행했던 남자’였다. 사람들은 HM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그의 이름이 헨리 몰레이슨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헨리의 뇌는 다른 과학자들의 연구를 도울 목적으로 2401개의 얇은 조각으로 잘려 입체 이미지로 만들어졌다. 이후 비슷한 증상을 지닌 사람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면 그의 삶은 진정한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박상익 기자 dir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