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라이프] 락앤락 김준일 회장, 밀폐용기 하나로 중국 정복한 이 남자…7년내 주방생활용품 세계 1위 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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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오피스 - 일을 놀이로 즐기는 김준일 락앤락 회장
락앤락 전체 매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 51%…지난해 中 매출 2605억원
락앤락 전체 매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 51%…지난해 中 매출 2605억원
버버리 코트, 호치키스, 크리넥스…. 특정 브랜드가 어떤 상품이나 산업 카테고리의 대명사로 통용되는 경우다. 반찬통에서는 ‘락앤락(Lock&Lock)’이 그렇다. 1998년 선보인 세계 최초의 4면 결착 밀폐용기 락앤락은 일반 명사가 되다시피했다. 반찬통 하나로 시가총액 1조3000억원이 넘는 회사를 이끌고 있는 이가 김준일 회장(61)이다.
락앤락의 성장 배경엔 김 회장의 ‘집요한 성실함’이 자리잡고 있다. 맨손으로 락앤락을 일군 김 회장은 지금도 1년 365일 중 3분의 2 이상을 해외에 머물며 마케팅을 진두지휘한다. 진짜 ‘독종’이 아니고선 흉내내기조차 어렵다. 존재 이유를 찾기 위해 언제나 뭔가 일에 몰두하고 있는 경영자라는 게 주변의 평이다.
대구에서 3남4녀 중 여섯째로 태어난 김 회장은 부친의 사업 실패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1968년 중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에 올라온 이유다. 하지만 고교 진학에 실패했다. 중학교 때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체육 점수를 받지 못한 게 발목을 잡았다. 결국 검정고시를 거쳐 방송통신대 행정학과에 진학했다.
1978년 27세 되던 해에 ‘국진유통’을 세우고 수입업에 뛰어든 건 신문에서 ‘수입 자유화’ 기사를 본 직후였다. 락앤락의 전신이다. 유럽 등에서 열린 전시회를 자주 찾은 그는 국내에서 팔릴 만한 주방용기를 들여왔다. 소득 증가로 수요가 많았고 사업은 술술 풀렸다. 7년간 미국과 유럽에서 200가지 제품을 수입해 그중 196개를 성공시켰다.
자신감을 얻은 김 회장은 1985년 ‘국진화공’을 설립하고 자체 생산을 시작했다. 제조업으로의 전환이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공장 설비투자를 위해 스위스 자금을 썼던 김 회장은 환율 급등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노사 분규로 임금을 3년간 2배로 올려준 것도 짐이 됐다. 결국 지분을 팔고 회사를 떠났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1988년 다시 유통업을 시작해 자금을 차곡차곡 모았다. 4년 뒤 국진화공을 다시 인수했고, 회사명을 ‘하나코비’로 바꿨다.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할 수는 없었다. 연구개발(R&D)과 영업에 회사 자원을 집중하며 도시락통, 욕실 제품 등을 내놨다.
김 회장은 10년가량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1998년 밀폐용기 단일 품목에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 세계 최초 4면 결착 밀폐용기 락앤락은 그렇게 탄생했다. < → 락앤락이 반찬통 대명사로 뜬 배경 > 그릇에 담긴 식품을 완전히 밀폐하는 성능을 인정받으면서 락앤락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반찬통의 대명사로 통할 만큼 고성장 가도를 달려왔다.
물론 위기도 있었다. 2007년 유리로 만든 밀폐용기가 나오면서 플라스틱 밀폐용기의 성장세가 주춤하는 듯했다. 락앤락은 갖은 노력 끝에 기존 플라스틱 소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동시에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며 위기를 극복했다.
락앤락은 지난 2분기 연결기준 매출 1344억원에 영업이익 237억원, 당기순이익 173억원을 거뒀다.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에 비해 13% 증가한 것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중국법인 매출이다. 전년 동기보다 28.8% 증가한 726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락앤락의 전체 매출 5084억원 중 중국 매출은 2605억원으로 51%를 차지한다. 한국 시장 비중은 32%에 불과하다.
김 회장은 2003년 일찌감치 중국 진출을 결심했다. 회사 매출이 1050억원에 불과하던 때로, 한국 시장만으론 사세를 키우는 데 한계가 있다고 봤다. 처음엔 관세와 운임을 내면서 한국에서 만든 제품을 수입해 팔았다. 유명 브랜드를 선호하는 중국인들에겐 ‘메이드 인 코리아’는 고급 제품으로 통했다. 4년간 브랜드 충성도를 높인 뒤 중국 공장에서 만든 제품을 팔기 시작했고 이 전략은 주효했다.
김 회장의 취미는 ‘일’이다. 그는 “일하는 것과 노는 것을 분리해 생각하기 어렵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최고경영자(CEO)는 발에 땀나게 뛰어다녀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일을 할 때면 으레 흥분되고 때론 스릴도 느낀다”며 “생각하는 대로 사업이 이뤄질 때 맛보는 짜릿함은 어떤 감정과도 비교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일과 놀이는 분리돼 있는 게 아닙니다. 일하는 걸 노는 것으로 만들어야 흠뻑 빠져들 수 있어요. 공장 투어를 하고 해외 백화점 매장 7곳 정도 돌아보면 그게 다 운동 아니겠습니까” <→ 워커홀릭의 진정한 의미> 라고도 했다.
투박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다정하면서 섬세한 면도 있다. 임직원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락앤락이 영유아보육법상 직장 어린이집 설치 대상은 아니지만 김 회장은 임직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여직원을 위해 회사 근처에 보육시설 설치를 지시했고 지난해 어린이집을 열었다.
락앤락은 2020년 매출 10조원을 달성할 계획이다. 동시에 글로벌 주방생활용품 1위 업체가 되는 게 목표다.
김 회장은 “아웃소싱 제조 비율을 점차 늘려나가 제품 카테고리를 다양화한 뒤 유통망 확대에 나설 것”이라며 “추진 중인 신사업이 궤도에 오르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유럽 주방용품 업체를 인수합병(M&A)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김정은 기자 likesmile@hankyung.com
락앤락의 성장 배경엔 김 회장의 ‘집요한 성실함’이 자리잡고 있다. 맨손으로 락앤락을 일군 김 회장은 지금도 1년 365일 중 3분의 2 이상을 해외에 머물며 마케팅을 진두지휘한다. 진짜 ‘독종’이 아니고선 흉내내기조차 어렵다. 존재 이유를 찾기 위해 언제나 뭔가 일에 몰두하고 있는 경영자라는 게 주변의 평이다.
대구에서 3남4녀 중 여섯째로 태어난 김 회장은 부친의 사업 실패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1968년 중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에 올라온 이유다. 하지만 고교 진학에 실패했다. 중학교 때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체육 점수를 받지 못한 게 발목을 잡았다. 결국 검정고시를 거쳐 방송통신대 행정학과에 진학했다.
1978년 27세 되던 해에 ‘국진유통’을 세우고 수입업에 뛰어든 건 신문에서 ‘수입 자유화’ 기사를 본 직후였다. 락앤락의 전신이다. 유럽 등에서 열린 전시회를 자주 찾은 그는 국내에서 팔릴 만한 주방용기를 들여왔다. 소득 증가로 수요가 많았고 사업은 술술 풀렸다. 7년간 미국과 유럽에서 200가지 제품을 수입해 그중 196개를 성공시켰다.
자신감을 얻은 김 회장은 1985년 ‘국진화공’을 설립하고 자체 생산을 시작했다. 제조업으로의 전환이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공장 설비투자를 위해 스위스 자금을 썼던 김 회장은 환율 급등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노사 분규로 임금을 3년간 2배로 올려준 것도 짐이 됐다. 결국 지분을 팔고 회사를 떠났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1988년 다시 유통업을 시작해 자금을 차곡차곡 모았다. 4년 뒤 국진화공을 다시 인수했고, 회사명을 ‘하나코비’로 바꿨다.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할 수는 없었다. 연구개발(R&D)과 영업에 회사 자원을 집중하며 도시락통, 욕실 제품 등을 내놨다.
김 회장은 10년가량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1998년 밀폐용기 단일 품목에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 세계 최초 4면 결착 밀폐용기 락앤락은 그렇게 탄생했다. < → 락앤락이 반찬통 대명사로 뜬 배경 > 그릇에 담긴 식품을 완전히 밀폐하는 성능을 인정받으면서 락앤락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반찬통의 대명사로 통할 만큼 고성장 가도를 달려왔다.
물론 위기도 있었다. 2007년 유리로 만든 밀폐용기가 나오면서 플라스틱 밀폐용기의 성장세가 주춤하는 듯했다. 락앤락은 갖은 노력 끝에 기존 플라스틱 소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동시에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며 위기를 극복했다.
락앤락은 지난 2분기 연결기준 매출 1344억원에 영업이익 237억원, 당기순이익 173억원을 거뒀다.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에 비해 13% 증가한 것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중국법인 매출이다. 전년 동기보다 28.8% 증가한 726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락앤락의 전체 매출 5084억원 중 중국 매출은 2605억원으로 51%를 차지한다. 한국 시장 비중은 32%에 불과하다.
김 회장은 2003년 일찌감치 중국 진출을 결심했다. 회사 매출이 1050억원에 불과하던 때로, 한국 시장만으론 사세를 키우는 데 한계가 있다고 봤다. 처음엔 관세와 운임을 내면서 한국에서 만든 제품을 수입해 팔았다. 유명 브랜드를 선호하는 중국인들에겐 ‘메이드 인 코리아’는 고급 제품으로 통했다. 4년간 브랜드 충성도를 높인 뒤 중국 공장에서 만든 제품을 팔기 시작했고 이 전략은 주효했다.
김 회장의 취미는 ‘일’이다. 그는 “일하는 것과 노는 것을 분리해 생각하기 어렵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최고경영자(CEO)는 발에 땀나게 뛰어다녀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일을 할 때면 으레 흥분되고 때론 스릴도 느낀다”며 “생각하는 대로 사업이 이뤄질 때 맛보는 짜릿함은 어떤 감정과도 비교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일과 놀이는 분리돼 있는 게 아닙니다. 일하는 걸 노는 것으로 만들어야 흠뻑 빠져들 수 있어요. 공장 투어를 하고 해외 백화점 매장 7곳 정도 돌아보면 그게 다 운동 아니겠습니까” <→ 워커홀릭의 진정한 의미> 라고도 했다.
투박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다정하면서 섬세한 면도 있다. 임직원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락앤락이 영유아보육법상 직장 어린이집 설치 대상은 아니지만 김 회장은 임직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여직원을 위해 회사 근처에 보육시설 설치를 지시했고 지난해 어린이집을 열었다.
락앤락은 2020년 매출 10조원을 달성할 계획이다. 동시에 글로벌 주방생활용품 1위 업체가 되는 게 목표다.
김 회장은 “아웃소싱 제조 비율을 점차 늘려나가 제품 카테고리를 다양화한 뒤 유통망 확대에 나설 것”이라며 “추진 중인 신사업이 궤도에 오르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유럽 주방용품 업체를 인수합병(M&A)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김정은 기자 like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