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복원공사가 5월께 마무리된다. 2008년 2월10일 불탄 후 5년3개월 만이다. 이번 복원 공사를 통해 숭례문의 좌우측 성곽이 100여년 만에 원형 일부를 되찾았다. 남산 방향인 오른쪽으로 53m, 왼쪽으로 16m 등 총 69m의 성곽을 복원했다.
1900년 대 초반 일제시대엔 숭례문으로 전차가 다녔다. 노선을 하나 더 깔면서 전차가 숭례문으로 지나다닐 수 없게 되자 일제가 성곽을 헐었다. 일본의 황태자가 서울로 들어오면서 남대문을 지나갈 수 없다며 서쪽 성곽을 헐었다는 설도 있다.
“일제가 1907년 9월부터 1909년 5월까지 우리나라의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성벽들을 철거하는 사업을 했어요. 이때 허물어졌던 성곽 일부가 (이번 복원 사업으로) 다시 살아난 거죠.” 문화재청 이정연 사무관의 설명이다.
숭례문 성곽이 헐리기 전, 성벽 안 쪽에는 ‘없는 것만 빼고 다 있던’ 시장통이 있었다. 19세기 말 한국을 찾았던 미군 에드먼드는 기행문에서 신기한 시장통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 보는 그림같은 가게에서 물건을 흥정하고 있었다. 가게들은 좁아서 주인들도 그 속에 들어가 앉을 수 없었다.…물건은 가게 속 시렁에 쌓여 있었는데 손님이 필요한 것을 말하면 주인은 팔을 벌려 이를 꺼내왔다. 두 손이 어떻게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잘 아는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숭례문은 축조된 이후 한양으로 들어가는 ‘정문’의 역할을 맡아 왔다. 조선의 왕들은 신하를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보낼 때나 전장에 보낼 때 숭례문까지 나가 배웅했다. 중요한 손님이 올 때도 숭례문에서 맞았다. 세종은 중국의 천자가 보내는 칙서가 올 때 숭례문에서부터 사신을 맞이하는 화려한 장식을 세우도록 했다. 고종은 고향에 다녀오는 자신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숭례문에 나가 맞았다.
당시 문화재청장이었던 유홍준 교수는 얼마 전 한 TV 토크쇼에 출연해 “국보 1호 숭례문에 화재가 났던 시절의 문화재청장이란 사실은 죽고 난 다음에도 기록에 남을 것”이라며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화재가 났던 2월 10일은 ‘문화재 방재의 날’로 정해졌다.
정유진 씨(23)는 “그때 고등학생이었는데 학교에서 숭례문이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 믿을 수 없었다. 왜 그렇게 국보 관리에 소홀했는지…”라고 회상했다. 당시 인터넷에는 “숭례문이 화재로 무너지는 걸 보니까 잠이 안 온다” “숭례문이 불타고 있는 모습을 봤다. 정말 눈물이 핑 돌았다”는 글들이 올라왔다.
한 대학생은 “숭례문 복원이 마무리되면 남자친구와 꼭 가보고 싶어요”라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한경닷컴 권효준 인턴기자 winterrose66@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