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1년 4월4일 남프랑스의 마르세유 항. 미지의 세계에 대한 꿈을 품은 한 야성미 넘치는 중년의 화가가 남태평양의 타히티로 향하는 배에 오르고 있었다. 전직 주식중개인인 폴 고갱(1848~1903)이라는 이 타협할 줄 모르는 인물은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가족을 내팽개친 몰인정한 작자였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콧수염을 기른 이 고집불통의 인물이 훗날 후기 인상파의 거물이며 현대미술의 서장을 연 위대한 화가로 평가받으리라는 걸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타히티로 향하는 배에 오른 것은 온갖 도그마와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문명사회의 허위의식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강자의 논리를 진리라는 이름으로 강요하며 새로운 사상, 새로운 예술의 시도를 억누르는 그곳에 희망은 없었다. 원시문명으로 돌아가 본래의 순수한 마음과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진정한 예술도 꽃을 피울 수 있다고 확신했다. 물론 그는 그곳에서 지고지순한 원주민 여인과의 로맨틱한 사랑도 꿈꿨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그가 타히티에서 목격한 풍경은 뜻밖에도 서구문화에 오염돼 순수성을 상실한 모습이었다. 식민지 개척자와 선교사들은 그 원시적 낙원에 서구문명의 그림자를 드리웠던 것이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만난 여인 티티 역시 원시사회의 여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백인과 원주민의 혼혈인 이 여인은 문명사회의 안락함에 길들여져 원시사회를 동경하며 타히티에 온 고갱의 이상을 충족시켜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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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서둘러 파프티에를 떠나 원시문명을 고스란히 간직한 남쪽의 파타이에아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는 동거할 여자를 찾던 중 원주민 여인으로부터 13세밖에 안 된 자신의 딸을 아내로 삼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는다. 그는 아마도 고갱을 부유한 유럽인으로 생각하고 이런 제안을 한 것으로 보인다. 테마하나라는 이름의 딸은 이국적 아름다움을 간직한 앳된 미인으로 43세 중년화가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그는 테마하나와의 삶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알아주지 않는 프랑스 사회에서 받은 마음의 상처를 씻고 정서적 안정을 되찾아갔다. 테마하나는 곧 임신했고 행복한 나날이 이어졌다. 그는 임신한 테마하나를 모델로 한 ‘망고를 든 여인’ 등 원주민 여인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아나갔다. 그러나 기독교 문명사회의 유산은 작품에 암암리에 영향을 미쳐 그는 타히티 사람들의 삶에 기독교적 외피를 입히곤 했다. 그러나 테마하나와의 삶도 그리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고갱에게 그림을 주문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는 잇단 병마에 신음했다. 결국 그는 테마하나와 아이를 남겨둔 채 프랑스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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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삼촌에게 9000프랑의 유산을 물려받아 잠시 궁핍에서 벗어나는데 그는 그 돈으로 아파트를 빌리고 자바 여인 안나 마르탱과 동거를 시작한다. 그는 기괴한 복장을 하고 이 교양 없는 자바 여인과 파리를 누벼 주위의 빈축을 샀다. 그러나 이 여인은 고갱과 함께 브르타뉴에 체류 중일 때 집을 정리한답시고 파리에 먼저 돌아와 고갱의 물건과 작품들을 몽땅 털어 줄행랑을 쳐버렸다. 자신이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에 대한 미지근한 반응에 상처를 입은 데다 발목까지 다친 상황에서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고갱이 다시 타히티로 돌아가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 배짱 두둑한 화가는 1895년 7월 다시 마르세유에서 배를 탔고 그해 9월 다시 타히티 땅을 밟았다. 그는 전보다 더 문명 세계에 오염된 파페에타를 떠나 푸나아우이아 섬에 정착한다. 그는 이번에는 그곳에서 14세 소녀 테후라를 만나 동거에 들어간다. 테후라와는 비교적 오랜 기간인 6년 동안 사랑을 나누며 두 아이를 둔다. 그러나 테후라와의 동거 초기 고갱은 발목 부상에서 완쾌되지 않은 데다 몽파르나스 사창가에서 감염된 매독으로 인해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런 와중에 접한 딸 알린의 사망 소식은 그로 하여금 자살 기도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시련 속에서도 그의 창작 의욕은 식지 않았다. 자신의 새로운 회화이념과 세계관을 종합한 걸작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는 이 고난의 한가운데서 탄생했다.
매독은 그를 서서히 죽음의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갔다. 회복 가능성이 없다는 걸 깨달은 데다 문명의 손길이 푸나아우이아에까지 미치자 고갱은 1901년 8월 테후라와 두 아이를 남겨둔 채 마르케사스 군도의 히비-오아 섬으로 이주한다. 그는 아투아나 마을에 ‘쾌락의 집’을 짓고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운다. 그는 모르핀과 알코올에 의존하지 않고는 잠시도 살 수 없는 폐인이었지만 다시금 마리 로제 바스코와 동거하며 딸 하나를 둔다. 그러나 그의 병수발에 진저리가 난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가버렸고 고갱은 원주민 주술사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외롭게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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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치는 곳마다 자식을 낳고 계속 가족을 버리고 떠난 고갱의 매정하고 부도덕한 행태는 두고두고 그의 작품을 평가하는 데 족쇄로 작용했다. 그러나 이성과 윤리적 속박에서 벗어난 그의 무분별한 행동을 그가 그토록 애타게 갈구했던 본능을 마음껏 발산하는 원시적 삶의 구현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볼 수는 없을까. 그는 삶은 물론 작품 속에도 그런 자신의 원시적 이상을 고스란히 녹여 넣었기 때문이다. 문명과 도덕의 잣대로 그의 삶과 작품을 평가하는 한 우리는 고갱에게 영원히 다가갈 수 없을지 모른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