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창근 칼럼] 한국 재벌의 역사성, 그 긍정과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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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생과 성장과정 原罪 있지만 재벌시스템이 글로벌 기업 키워
去勢 아닌 쓸모 살릴 접근을
추창근 < 기획심의실장 논설위원 >
去勢 아닌 쓸모 살릴 접근을
추창근 < 기획심의실장 논설위원 >
재벌의 영어표기가 ‘chaebol’인 데서 보듯 재벌은 한국의 대기업을 특정한다. ‘동일한 자본계통 아래 총수 및 그 가족에 의해 폐쇄적으로 소유·지배되는 대규모 기업집단’이 대체적인 정의다. 이 같은 기업집단은 다른 나라에도 많다.
원래는 2차대전 이전 일본 경제의 축이었던 ‘자이바쓰(財閥)’에서 나온 말이다. 1920년대 불황기를 거치면서 경제 패권을 굳힌 미쓰이·미쓰비시·스미토모·야스다 등 4대그룹이 대표적이다. 이들도 가족(가문)의 독점적 지배구조를 갖는 다각화된 산업경영체였다. 전후 맥아더 군정이 재벌을 해체, 소유와 경영을 분리시켰지만 지금도 ‘게이레쓰(系列)’라는 집단성을 유지하면서 막강한 지배력을 행사한다.
그 뿌리는 ‘정상(政商)’이다. 정경유착을 통해 이권을 얻은 상인이란 뜻 그대로, 19세기 말 메이지 시기의 식산흥업(殖産興業)에 편승해 거부를 쌓은 기업가들이다. 어용(御用) 사업에 참여한 반대급부였던 것이다.
진보경제학자인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한국 재벌의 역사성을 말했다. 최근 삼성그룹 사장단 회의 강연에서 “과거 정부가 대기업의 소유구조 왜곡이나 순환출자를 통한 사업다각화 상황을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문제삼는 것은 역사성을 무시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한국 재벌의 역사성은 무엇일까. 많은 공과(功過)가 있고, 특히 태생과 성장과정에서의 정경유착이 쌓은 원죄로부터 자유로울수 없다. 재벌은 1945년 해방 이후 귀속재산의 불하, 수입권 배정, 은행 융자에서 특혜를 받아 부를 축적했다. 1960년대부터 추진된 경제개발 계획이 수입대체산업 육성과 수출 촉진, 중화학공업 진흥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차관 도입 외자의 배분, 금융·세제 지원, 규제완화 등의 대표적 수혜자였다. 1970년대 이후 오일쇼크, 세계경기 불황, 외환위기 등에 의한 경제혼란기의 부실기업 정리, 산업구조조정 등도 재벌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 결과 재벌로의 집중은 심화됐고 문어발 사업영역과 선단식 경영으로 경제 지배력이 확고해졌다.
하지만 이런 관점만으로 한국 재벌의 성격을 규정하고, 양복지와 설탕을 만들던 삼성이 오늘날 세계 최고의 반도체 휴대폰 TV 기업으로 커온 역사를 설명할 수는 없다. 끊임없이 미래산업을 발굴해 역량을 집중함으로써 세계시장을 장악하게된 동인(動因)은 재벌의 도전적 기업가 정신이었다. 선단식 경영은 돈과 기술, 정보, 인력 등 모든 것이 척박한 여건에서 실패리스크를 분산시키고 집단 내의 경영자원을 공유해 시너지를 높였다. 총수의 강화된 지배력은 신규사업에 대한 모험적이고도 지속적인 투자, 기술개발 시장개척 인재육성을 가능케 함으로써 안정된 성장을 견인한 추진력이었다.
재벌은 이 땅의 환경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진화한 기업조직인 것이다. 재벌시스템을 통해 삼성 현대차 SK LG 등이 세계적 기업으로 우뚝 섰고, 50년 전 겨우 제분과 제당·면방의 ‘3백(三白)’에 머물렀던 한국 산업을 오늘날 전자·자동차·철강·석유화학·조선 등의 글로벌 메이저로 도약시킨 원동력이었다.
역사를 되짚는 것은 미래의 거울로 삼아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이다. 중요한 것은 긍정과 부정에 대한 균형된 평가다. 하지만 지금 경제민주화의 이름으로 정치권이 밀어붙이고 있는 재벌개혁론에서 재벌은 탐욕의 존재일 뿐이다. 전근대적 지배구조와 탈법적인 부의 세습, 전제 경영, 중소기업과의 불공정 거래, 승자독식에 의한 경제 양극화의 주범이라는 외눈박이의 시각만 있다.
재벌의 힘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패권이 되고 있다며 재벌을 거세(去勢)하겠다는 정치공학에서 재벌이 지금까지 이뤄낸 성취는 부정당한다. 성장의 주체로 나라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존재감도 없다. 물론 앞으로도 재벌이 한국 경제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끌 최선의 경영체제인지에 대한 의문은 있다. 재벌의 과오, 변칙과 불공정, 탈법 등 뜯어 고쳐야 할 모순 또한 많고, 재벌 스스로 국민의 반감이 어디서 비롯됐는지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럼에도 한국 경제의 장래를 위해 아직 재벌의 쓸모는 많다. 삼성이, 현대차가 애플과 도요타를 이기고 극복하려면 갈 길이 멀다. 그런데 지금 한국 재벌들은 길을 잃고 있다.
추창근 < 기획심의실장 논설위원 >
원래는 2차대전 이전 일본 경제의 축이었던 ‘자이바쓰(財閥)’에서 나온 말이다. 1920년대 불황기를 거치면서 경제 패권을 굳힌 미쓰이·미쓰비시·스미토모·야스다 등 4대그룹이 대표적이다. 이들도 가족(가문)의 독점적 지배구조를 갖는 다각화된 산업경영체였다. 전후 맥아더 군정이 재벌을 해체, 소유와 경영을 분리시켰지만 지금도 ‘게이레쓰(系列)’라는 집단성을 유지하면서 막강한 지배력을 행사한다.
그 뿌리는 ‘정상(政商)’이다. 정경유착을 통해 이권을 얻은 상인이란 뜻 그대로, 19세기 말 메이지 시기의 식산흥업(殖産興業)에 편승해 거부를 쌓은 기업가들이다. 어용(御用) 사업에 참여한 반대급부였던 것이다.
진보경제학자인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한국 재벌의 역사성을 말했다. 최근 삼성그룹 사장단 회의 강연에서 “과거 정부가 대기업의 소유구조 왜곡이나 순환출자를 통한 사업다각화 상황을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문제삼는 것은 역사성을 무시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한국 재벌의 역사성은 무엇일까. 많은 공과(功過)가 있고, 특히 태생과 성장과정에서의 정경유착이 쌓은 원죄로부터 자유로울수 없다. 재벌은 1945년 해방 이후 귀속재산의 불하, 수입권 배정, 은행 융자에서 특혜를 받아 부를 축적했다. 1960년대부터 추진된 경제개발 계획이 수입대체산업 육성과 수출 촉진, 중화학공업 진흥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차관 도입 외자의 배분, 금융·세제 지원, 규제완화 등의 대표적 수혜자였다. 1970년대 이후 오일쇼크, 세계경기 불황, 외환위기 등에 의한 경제혼란기의 부실기업 정리, 산업구조조정 등도 재벌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 결과 재벌로의 집중은 심화됐고 문어발 사업영역과 선단식 경영으로 경제 지배력이 확고해졌다.
하지만 이런 관점만으로 한국 재벌의 성격을 규정하고, 양복지와 설탕을 만들던 삼성이 오늘날 세계 최고의 반도체 휴대폰 TV 기업으로 커온 역사를 설명할 수는 없다. 끊임없이 미래산업을 발굴해 역량을 집중함으로써 세계시장을 장악하게된 동인(動因)은 재벌의 도전적 기업가 정신이었다. 선단식 경영은 돈과 기술, 정보, 인력 등 모든 것이 척박한 여건에서 실패리스크를 분산시키고 집단 내의 경영자원을 공유해 시너지를 높였다. 총수의 강화된 지배력은 신규사업에 대한 모험적이고도 지속적인 투자, 기술개발 시장개척 인재육성을 가능케 함으로써 안정된 성장을 견인한 추진력이었다.
재벌은 이 땅의 환경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진화한 기업조직인 것이다. 재벌시스템을 통해 삼성 현대차 SK LG 등이 세계적 기업으로 우뚝 섰고, 50년 전 겨우 제분과 제당·면방의 ‘3백(三白)’에 머물렀던 한국 산업을 오늘날 전자·자동차·철강·석유화학·조선 등의 글로벌 메이저로 도약시킨 원동력이었다.
역사를 되짚는 것은 미래의 거울로 삼아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이다. 중요한 것은 긍정과 부정에 대한 균형된 평가다. 하지만 지금 경제민주화의 이름으로 정치권이 밀어붙이고 있는 재벌개혁론에서 재벌은 탐욕의 존재일 뿐이다. 전근대적 지배구조와 탈법적인 부의 세습, 전제 경영, 중소기업과의 불공정 거래, 승자독식에 의한 경제 양극화의 주범이라는 외눈박이의 시각만 있다.
재벌의 힘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패권이 되고 있다며 재벌을 거세(去勢)하겠다는 정치공학에서 재벌이 지금까지 이뤄낸 성취는 부정당한다. 성장의 주체로 나라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존재감도 없다. 물론 앞으로도 재벌이 한국 경제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끌 최선의 경영체제인지에 대한 의문은 있다. 재벌의 과오, 변칙과 불공정, 탈법 등 뜯어 고쳐야 할 모순 또한 많고, 재벌 스스로 국민의 반감이 어디서 비롯됐는지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럼에도 한국 경제의 장래를 위해 아직 재벌의 쓸모는 많다. 삼성이, 현대차가 애플과 도요타를 이기고 극복하려면 갈 길이 멀다. 그런데 지금 한국 재벌들은 길을 잃고 있다.
추창근 < 기획심의실장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