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원권 지폐 뒷면 그림인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가 실린 보물 제585호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이하 진적첩)’이 34억원 팔려 국내 고미술품 경매 최고가를 경신했다. 진적첩은 일종의 서화첩으로, 퇴우는 퇴계 이황과 우암 송시열을 일컫는다.

미술품 전문 경매회사 K옥션(대표 이상규)이 11일 오후 5시 실시한 가을 경매에서 시작가 26억원에 출발한 진적첩은 현장 참석자 및 전화 응찰자들의 16차례 경합 끝에 34억원에 낙찰됐다. 국내 고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18억원)은 18세기 백자청화운룡문호(白磁靑畵雲龍文壺)가 갖고 있었다.

이영재 모암문고 명예대표가 소장하고 있는 이 서화첩은 앞뒤 표지 두 면을 포함, 총 16면으로 구성돼 있다. 이황의 ‘회암서절요서’를 비롯해 송시열의 발문 두 편, 겸재의 ‘계상정거도’ ‘무봉산중도’ ‘풍계유택도’ ‘인곡정사’ 등 4점, 겸재의 둘째아들인 만수의 글, 이병연의 칠언절구, 임헌회의 후식, 김용진의 제서, 이강호의 발문 등이 수록돼 있다. 낙찰자는 개인 소장가로 알려졌다.

이상규 K옥션 대표는 “고미술 시장이 IMF 외환위기 이후 16년간 침체기를 보냈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희귀성이 높은 고서화, 도자기들은 오히려 가치를 재평가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진적첩이 박수근의 ‘빨래터’(45억2000만원), 이중섭의 ‘황소’(35억6000만원)에 이어 국내 세 번째로 높은 가격에 팔리면서 앞으로 고미술 시장 활성화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하지만 고미술 시장이 활기를 띠려면 우선 신뢰성이 확립돼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윤용철 인사전통문화보존회장은 “고미술업계의 반목과 불신이 고서화, 도자기 등 고미술품 가격 하락의 주범”이라며 “이대로 가다가는 시장이 고사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업계와 컬렉터, 정부가 신뢰를 바탕으로 시장을 재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미술시장은 2006년 초까지 고미술이 주도해왔다. 국민화가 박수근의 유화가 4억원에 낙찰됐던 2001년 4월, 겸재 정선의 ‘노송영지도(老松靈芝圖)’가 7억원에 팔려 고미술이 현대미술의 최고가를 눌렀다. 2004년 12월 고려 청자상감 매화 새 대나무무늬 매병이 10억9000만원, 2006년 2월 조선 백자철화 구름 용무늬 항아리가 16억2000만원에 팔리면서 신기록도 이어갔다.

그러나 2006년 하반기부터 서양미술 시장이 활기를 이어가며 고미술품 거래가 급갑했다. 거래가 주춤한 만큼 가격도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지난해 국내 고미술 시장에서 10억원 이상 고가에 팔린 국내 근·현대미술품이 7점인 반면 고미술품은 2점에 불과했다. 18세기 조선 왕실에서 쓰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백자청화운룡문호(18억원)’와 왕비의 처소에 둘렀을 것으로 전해져오는 ‘십장생도팔곡병(十長生圖八曲屛·13억5500만원)만 유일하게 10억원을 넘어섰다. 백자호(5억8000만원)를 비롯해 성종대왕비 공혜왕후 어보(4억6000만원), 단원 김홍도의 ‘선고지과도(仙姑持果圖·3억500만원)’와 ‘홍경해형도(弘景解形圖·3억원)’, 겸재의 ‘괴단야화도(槐壇夜話圖·2억원)’ 등 수작들도 2억~5억원대에 거래됐다. 국보급 작품 치고는 싼 편이다.

조선시대 거장들의 낙찰 총액 역시 10억원을 밑돌았다. 단원의 그림이 총 7점, 9억7000만원어치가 팔려 선두를 지켰고 겸재(4억6500만원), 장승업(3억7000만원), 흥선대원군 이하응(2억4400만원), 최북(2억1300만원), 추사 김정희(1억6700만원)가 그 뒤를 이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