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과 날줄] 나무들의 세상, 사람들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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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다퉈 피는꽃 열매맺으려 경쟁
조화없으면 누구도 빛나지 않아
세상사 아름다운 양보 많아지길
이순원 < 소설가 >
조화없으면 누구도 빛나지 않아
세상사 아름다운 양보 많아지길
이순원 < 소설가 >
대부분의 과실나무들은 해거리를 한다. 한 해 열매를 많이 맺으면 다음해는 휴식년처럼 열매를 덜 맺는다. 사람이 일일이 그 수를 통제하지 않을 때 감나무도 그렇고, 사과나무도 그렇고, 배나무도 그렇다. 그래서 과수원을 하는 사람들은 열매가 어릴 때 미리 그것을 솎아줘 매년 나무에 달리는 과실을 일정하게 한다. 그래야 알이 고르고 굵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태어나 자란 어린 소년의 눈으로 보았을 때, 다른 나무들보다 과실나무들은 수명이 짧은 것 같았다. 나무의 수명도 짧지만 그 나무의 경제적 수명은 더욱 짧아 20~30년 주기로 나무를 바꿔주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랐다.같은 배나무라도 과수밭에 선 나무는 일일이 손을 봐주지만 마당가의 배나무는 자라면 자라는 대로 그냥 둬 그 마을에서 가장 키가 큰 아름드리 배나무로 자라기도 한다. 밤나무 역시 대개는 그냥 둬 아름드리로 자라고, 감나무 역시 일일이 손질하는 과수밭의 것이 아니면 그냥 제멋대로 자라도록 둔다.
그런데 과실나무를 솎아주지 않아 한 나무에 너무 많은 열매가 달리게 되면 아무리 굵은 열매가 달리는 나무더라도 전체적으로 과실이 잘다. 게다가 너무 많이 달린 열매의 무게로 가지가 아래로 축 늘어지기도 하고, 이것이 또 겨울에 눈 이불을 뒤집어쓰게 되면 설해(雪害)를 입게 되는 것이다.
제 몸에 달고 있는 열매의 많고 적음과 적당함의 조화를 나무 스스로 이뤄야 하는데, 나무도 꽃도 열매도 스스로 그런 통제를 하지 못한다. 일단 꽃이 피면 모두 자기가 끝까지 그 나무에서 살아남으려고 경쟁한다. 그러다보니 전체적으로 작아지고 볼품이 없어질 수밖에 없다.
초여름 시절부터 한 가지에 많은 열매를 맺은 나무를 볼 때 고등학교 시절의 일 하나가 떠오른다. 축구부가 있는 학교였다. 당시 전국대회에 나가면 30여개 학교 이상이 참가하는 대회에서 언제나 4강 안에 들었다. 중간에 강팀을 만난다 하더라도 8강 전에 탈락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 전통은 뒤에까지 이어져 2002년과 2006년 월드컵 때도 여러 명의 국가대표선수를 배출한 학교이기도 하다.
그런데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무리 좋은 성적을 올린다 하더라도 4강이거나 준우승이었다. 전교생 모두 우승에 목이 말라 있는데도 단 한 번 우승을 하지 못했다. 3학년에 아주 우수한 청소년 국가대표 선수가 두 명이나 있는데도 그랬다. 한 선수는 이미 3월에 어느 실업팀(지금의 프로팀)으로, 또 한 선수는 명문대학팀으로 가기로 결정돼 있었다.
문제는 두 사람의 조화였다. 개인으로 보면 참으로 빛나는 선수들이지만 열한 명 전체로 보면 그들 둘은 축구장 안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후배 선수들이 공을 잡으면 서로 자기에게 공을 패스하라고 소리 질렀다. 후배들은 누구에게 공을 줘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그 틈에 실수가 나와 구멍이 생기곤 했다.
자라나는 선수들이다보니, 또 선후배 간의 위계질서가 분명하던 시절이다보니 선수들 모두 전체 경기의 흐름보다 공격 전방에 나서 저마다 자기에게 공을 보내달라고 사인을 하는 두 선배의 눈치를 보기에 바빴던 것이다.나중에 들은 얘기로 더 좋은 위치의 다른 사람에게 공을 패스해 골을 넣었을 경우에조차 자기에게 공을 주지 않았다고 경기 중에 눈을 부라리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두 선배가 졸업한 다음해, 정말 잘하는 두 선수가 졸업을 해 다들 걱정을 했는데 오히려 그해 더 많은 대회에서 우승했다.
왜 그런 일이 생기게 되었을까. 조화라는 것은 서로의 장점이 잘 드러나게 빛을 발하며 어울리는 모습이기도 하지만, 또 그것은 아름다운 양보이기도 하다. 참여 속의 조화도 있지만 상대를 돋보이게 양보하며 물러서는 가운데 이뤄지는 우리 인생의 깊은 조화도 있는 것이다.
봄에 나무에 핀 모든 꽃들이 다 열매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꽃들은 서로 자신이 열매를 맺으려고 하고, 그런 욕심이 지나칠 때 오히려 제 어미인 나무의 몸을 상하게 한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일 역시 그것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이순원 < 소설가 lsw8399@hanmail.net >
어린 시절 시골에서 태어나 자란 어린 소년의 눈으로 보았을 때, 다른 나무들보다 과실나무들은 수명이 짧은 것 같았다. 나무의 수명도 짧지만 그 나무의 경제적 수명은 더욱 짧아 20~30년 주기로 나무를 바꿔주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랐다.같은 배나무라도 과수밭에 선 나무는 일일이 손을 봐주지만 마당가의 배나무는 자라면 자라는 대로 그냥 둬 그 마을에서 가장 키가 큰 아름드리 배나무로 자라기도 한다. 밤나무 역시 대개는 그냥 둬 아름드리로 자라고, 감나무 역시 일일이 손질하는 과수밭의 것이 아니면 그냥 제멋대로 자라도록 둔다.
그런데 과실나무를 솎아주지 않아 한 나무에 너무 많은 열매가 달리게 되면 아무리 굵은 열매가 달리는 나무더라도 전체적으로 과실이 잘다. 게다가 너무 많이 달린 열매의 무게로 가지가 아래로 축 늘어지기도 하고, 이것이 또 겨울에 눈 이불을 뒤집어쓰게 되면 설해(雪害)를 입게 되는 것이다.
제 몸에 달고 있는 열매의 많고 적음과 적당함의 조화를 나무 스스로 이뤄야 하는데, 나무도 꽃도 열매도 스스로 그런 통제를 하지 못한다. 일단 꽃이 피면 모두 자기가 끝까지 그 나무에서 살아남으려고 경쟁한다. 그러다보니 전체적으로 작아지고 볼품이 없어질 수밖에 없다.
초여름 시절부터 한 가지에 많은 열매를 맺은 나무를 볼 때 고등학교 시절의 일 하나가 떠오른다. 축구부가 있는 학교였다. 당시 전국대회에 나가면 30여개 학교 이상이 참가하는 대회에서 언제나 4강 안에 들었다. 중간에 강팀을 만난다 하더라도 8강 전에 탈락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 전통은 뒤에까지 이어져 2002년과 2006년 월드컵 때도 여러 명의 국가대표선수를 배출한 학교이기도 하다.
그런데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무리 좋은 성적을 올린다 하더라도 4강이거나 준우승이었다. 전교생 모두 우승에 목이 말라 있는데도 단 한 번 우승을 하지 못했다. 3학년에 아주 우수한 청소년 국가대표 선수가 두 명이나 있는데도 그랬다. 한 선수는 이미 3월에 어느 실업팀(지금의 프로팀)으로, 또 한 선수는 명문대학팀으로 가기로 결정돼 있었다.
문제는 두 사람의 조화였다. 개인으로 보면 참으로 빛나는 선수들이지만 열한 명 전체로 보면 그들 둘은 축구장 안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후배 선수들이 공을 잡으면 서로 자기에게 공을 패스하라고 소리 질렀다. 후배들은 누구에게 공을 줘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그 틈에 실수가 나와 구멍이 생기곤 했다.
자라나는 선수들이다보니, 또 선후배 간의 위계질서가 분명하던 시절이다보니 선수들 모두 전체 경기의 흐름보다 공격 전방에 나서 저마다 자기에게 공을 보내달라고 사인을 하는 두 선배의 눈치를 보기에 바빴던 것이다.나중에 들은 얘기로 더 좋은 위치의 다른 사람에게 공을 패스해 골을 넣었을 경우에조차 자기에게 공을 주지 않았다고 경기 중에 눈을 부라리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두 선배가 졸업한 다음해, 정말 잘하는 두 선수가 졸업을 해 다들 걱정을 했는데 오히려 그해 더 많은 대회에서 우승했다.
왜 그런 일이 생기게 되었을까. 조화라는 것은 서로의 장점이 잘 드러나게 빛을 발하며 어울리는 모습이기도 하지만, 또 그것은 아름다운 양보이기도 하다. 참여 속의 조화도 있지만 상대를 돋보이게 양보하며 물러서는 가운데 이뤄지는 우리 인생의 깊은 조화도 있는 것이다.
봄에 나무에 핀 모든 꽃들이 다 열매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꽃들은 서로 자신이 열매를 맺으려고 하고, 그런 욕심이 지나칠 때 오히려 제 어미인 나무의 몸을 상하게 한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일 역시 그것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이순원 < 소설가 lsw8399@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