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화가 권순철 "예수 표정에서 한국인 넋 읽어냈죠"
고통을 견디는 예수의 얼굴, 온갖 풍상을 겪은 노인의 얼굴, 힘겨운 노동의 흔적이 묻어나는 서민의 얼굴….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갖고 있는 재불화가 권순철 씨(68)에게 얼굴은 인간사의 깊이와 시대정신을 담는 그릇이다. 수백년을 버텨온 거대한 바윗덩어리에서 느껴지는 삶의 무게를 무채색에 가까운 색감과 두터운 마티에르에 담아냈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1988년 프랑스로 건너간 뒤 파리와 서울을 오가며 활동한 권씨는 인고의 세월을 견뎌낸 인간의 표정과 눈빛을 통해 삶의 애환을 표현해온 작가다.

‘영혼의 빛’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는 활달한 붓터치로 그린 근작 ‘예수’ 시리즈를 비롯해 ‘얼굴’ ‘자화상’ ‘넋’ 시리즈 30여점과 얼굴 드로잉 30여점을 걸었다.

그는 파리에 터를 잡은 뒤 한국적인 정서와 원형의 정신세계를 추구해왔다. “수없이 많은 내면의 대화를 거치면 여러 색감들이 정교하게 혼합됩니다. 아마 ‘색채의 휴지통’이라는 말이 맞겠지요. 그 안에서 청색 황색 적색의 덩어리가 튀어나옵니다.”

그는 인체구조의 횡단을 통해 외모가 아닌 마음의 풍경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저는 에곤 실레나 프랜시스 베이컨과 같은 표현주의자가 아닙니다. 제가 찾는 것은 영혼적인 것이죠. ‘형태를 통해 정신을 구현한다(以形寫神)’고 말한 중국 동진시대 화가 구카이즈의 인물 미학론에 마음이 더 끌려요.”

이번에 선보인 ‘예수’ 시리즈는 종교적인 색채를 드러내기보다 예수의 얼굴을 통해 한국인의 ‘넋’과 ‘한’을 응축해낸 작품이다. 실체를 해체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우리의 정서를 표현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경제적으로 힘들었지만 푸근하고 소박한 인간애를 느낄 수 있었던 1970~1980년대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예수’ 시리즈와 함께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얼굴, 자화상, ‘넋’ 시리즈에도 저마다 삶의 편린이 녹아 있다. 역전에서, 대합실에서, 시장에서,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은 우리 역사의 상징성으로 다가온다.

“인간 개개인에게는 자신만의 시간 층위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층위가 켜켜이 쌓이면서 삶의 형태와 정신세계를 형성합니다. 모든 인생사가 희로애락을 갖고 있어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기도 하죠. 때로는 평탄한 능선을 따라 걷기도 하고요.”

이를 통해 인간은 역사를 써내려가며, 개인의 역사가 씨줄과 날줄로 엮이면서 시대의 역사가 만들어진다는 얘기다.

그의 작품은 언뜻 표현주의 계열처럼 보인다. 세밀하지 않고 거친 붓의 터치와 두꺼운 질감 때문이다. 그러나 형식적으로는 표현주의적 기법을 선택하고 있을지 몰라도 그가 주제를 다루는 방식이나 태도는 리얼리즘에 가깝다. 개개인의 역사를 ‘얼굴’이라는 화제를 통해 그리면서 그 안에 시대 정신을 담아낸 그의 작품이 인기를 끄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08년 6월 서울옥션에서 100호(132×160㎝) 크기의 ‘얼굴’ 시리즈가 6100만원에 낙찰됐고, 2010년 10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는 비슷한 크기의 작품이 5800만원에 팔렸다. 전시는 내달 4일까지 이어진다. (02)720-102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