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대암의 목탁소리도 아련한 연둣빛이었어,연둣빛 물안개 속으로 익사하고 있었어,// 대웅전을 지키던 처진 소나무 각선미 고운 가지들도 깔깔거리며 개헤엄을 치고 있었어,기척 없이 다가오던 미풍도 연초록 늪에 빠져 숨을 멈추었어,아미를 감춘 밀짚모자 비구니의 나비 걸음도 연초록 물안개 속으로 잠적했어,농염한 안개 속을 걸어 나온 여인이 손을 잡았어."('운문사의 봄' 부분)

제갈태일 시인(68 · 사진)이 새 사설시조집 《항아(姮娥)의 마당놀이》(고요아침 펴냄)를 내놓았다. 평시조의 초 · 중 · 종장을 탄력적으로 확장한 사설시조 87편에서 시인은 자연의 원초적 순수성과 관능미를 읊조리다가 부조리하고 혼란한 사회를 질타하는 골계와 해학의 미를 함께 녹여낸다. 시조의 진액을 곱씹게 하는 시편들이다.

표제어이면서 시집 1부의 주제인 '항아'는 중국 고대 신화 속의 달에 사는 미인(여신).시인은 본질적인 존재에 대한 애모와 정념의 감정을 '항아'로 대변했다.

'너는 늘 꿈을 꾸는 천상의 여인이었지,이슬비 젖은 음계 연주하는 꽃이었어,발목 흰 아이들을 품으며 수채화도 그렸지.// 물안개 고운 날은 꽃잎 속에 눈을 뜨고,난해한 신의 지문 마흔 아홉을 인화하면,물보다 진한 그리움이 연꽃으로 피었어.'('항아' 전문)

황장산과 월악산,무등산과 선유도,장생포,팔공산 갓바위 등 시인의 발길이 닿았던 곳의 풍경도 시조 안에서 새로운 감흥으로 되살아난다. '운문사의 봄'은 연둣빛 숲과 안개 속에 파묻힌 절을 배경으로 한 작품.눈썹을 슬쩍 감춘 비구니가 왔다 가는가 싶더니 한 여인이 내 손을 잡는다. 그러나 꿈인 듯 몽롱한 여인의 섬섬옥수는 알고보니 '속살을 온통 드러내며 내 품에 온 햇살'이다.

시인은 "사설은 반평생을 따라다닌 화두인데 이번에는 연인 항아와 걸쭉한 신명풀이(마당놀이)를 하며 사설로 세레나데를 풀었다"고 말했다. 그는 1979년 《시조문학》으로 등단한 뒤 서벌 송길자 씨와 '3인사설' 동인을 결성,국내 최초의 사설동인지 《간이역에서》를 발간했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