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중공업(옛 한국중공업)이 지난 40여년간 독점하다시피하던 국내 발전설비 시장에 '일본 경계령'이 떨어졌다. 도시바 미쓰비시 히타치 등 일본 업체들이 국내 업체들에 비해 앞서있는 대형 발전설비 노하우를 앞세워 수주전에 적극 뛰어들고 있다. 이에 따라 대형 발전설비 시장에서 일본 업체들에 안방을 내주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한국동서발전은 국내 첫 1000㎿급 석탄화력 발전소인 당진화력 9 · 10호기 주기기의 보일러를 공급할 우선협상대상자로 지난 5일 대림산업 · 히타치 컨소시엄을 선정했다. 터빈 발전기 부문의 우선협상대상자로는 미쓰비시 · 마루베니 컨소시엄이 뽑혔다.

국내 업체인 대림산업이 컨소시엄에 포함돼 있지만 핵심 기자재 공급이 아닌 설비 공사만 맡게 돼 있어 사실상 일본 업체들이 6000억원대 규모의 대규모 공사를 따낸 셈이다. 1000㎿급 발전설비의 운영실적이 없는 두산중공업은 고배를 마셨다.

◆일본 업체들의 역습

국내 발전설비 시장은 그동안 두산중공업이 독식해 왔다. 두산은 한국전력 산하의 5개 발전 자회사들이 운영하고 있는 40여기의 석탄화력 발전소에 보일러 터빈 등 주기기 공급을 도맡아왔다. 1996년 국내 발전설비 시장이 해외 업체에 개방된 이후에도 수십년간 축적해 놓은 사업 실적을 토대로 해외 업체들을 제치고 사업을 따왔다.

한 발전 자회사 관계자는 "두산중공업이 반복된 수주로 쌓아온 500㎿급 중 · 소형 발전설비의 원가경쟁력은 해외 업체들이 따라잡지 못할 정도"라며 "2000년대 초까지도 일본 업체들 사이에선 10억원 가까운 입찰 참가비용을 날리느니 아예 한국 시장 입찰에 참여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고 전했다.

상황이 바뀐 건 2004년 이후부터다. 남동발전이 발주한 영흥화력 3 · 4호기의 설비 규모가 한국 표준형이나 다름없었던 500㎿에서 870㎿로 커지면서 대형 일본 업체들도 국내 시장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됐다. 800㎿급 이상 대형 발전설비 분야 기술력에서는 두산중공업에 비해 앞서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당시 히타치는 영흥 3 · 4호기 입찰에서 두산중공업을 제치고 터빈 공급사업을 수주했다.

◆대형 발전설비 일본이 기술 우위

업계에선 당진화력 9 · 10호기의 우선협상대상자 선정을 계기로 일본 발전설비 업체들의 국내 진출이 가속화할 것으로 보고 있다. 국내 석탄화력발전소의 단일 발전설비 규모가 5~6년 만에 800~1000㎿로 2배 가까이 확충되면서 대형 발전설비 기술 분야에서 우위를 보이고 있는 일본 업체들이 수주경쟁에서 유리한 위치에 설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두산중공업은 2002년부터 국책과제에 참여, 1000㎿급 발전설비 개발을 진행하고 있지만 아직 실제 발전소 설치 경험이나 운전 경험은 전무하다. 업계 관계자는 "발전자회사들이 국내 초기 도입단계인 1000㎿급 발전설비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선 사업경험이 풍부한 사업자를 선호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당진화력 9 · 10호기 사업자 선정에서도 기술력과 사업금액의 평가 비중치가 7 대 3일 정도로 기술력을 우선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두산,1000㎿급 기술 상용화 가속

일본 발전설비 업체들의 공세에 맞닥뜨린 두산중공업은 비상이 걸렸다. 당장 올해 안에 발주될 영흥화력 5 · 6호기(870㎿) 등 대형 사업에서 일본 업체들과의 경쟁이 불가피해졌다. 해외 사업비중이 80% 가까이 달하고 있지만,일본 업체에 안방 시장을 내줄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두산중공업은 지난 5월 중부발전과 사업협력 양해각서(MOU)를 맺고 신보령 1 · 2호기에 국책과제로 개발한 1000㎿급 발전설비를 상용화하기로 했다.

업계 관계자는 "대형 발전설비 분야의 기술개발 투자를 지속적으로 확대해야 한다"며 "국내 업체들의 글로벌 선두기업 도약을 위해 정부 차원의 육성책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정호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