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평가사가 매기는 기업 신용등급에 대한 신뢰도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등급 상향 속도가 지나치게 빠른 데다 동일 등급 기업들의 재무상태도 천차만별이라 타당성을 인정받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때문에 일부 기업은 회사채를 발행할 때 등급 평균보다 훨씬 높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 자산운용사 등 기관투자가들은 아예 크레디트(신용) 평가조직을 내부에 따로 두는 경우도 많다는 설명이다.

◆신용등급과 시장평가 따로 놀아

28일 한국신용평가와 한국기업평가,한신정평가에 따르면 이달 들어 한진두산 여천NCC 등의 신용등급이 일제히 상향 조정됐다. 한진의 경우 'BBB+'였던 기업 신용등급이 'A-'로 올라갔고,두산은 회사채 신용등급이 'A-'에서 'A0'로 한 계단 높아졌다. 여천NCC는 지난해 6월 'A-'로 떨어졌던 신용등급이 6개월 만에 'A0'를 회복했다. 이들을 포함해 올 들어 신용등급이 올라간 기업은 벌써 22개사에 달한다.

이처럼 신용등급 상향이 '러시'를 이루고 있지만 기업들의 재무지표 간 격차가 커 적정 등급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 여천NCC의 부채비율과 차입금 의존도는 각각 147%와 42%로 51%와 14%인 두산에 비해 크게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길기모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신용등급 평가에는 산업의 특성과 업황,그룹 관련 이슈 등 다양한 변수가 포함되기 때문에 재무 수치만으로 단순 비교는 불가능하다"면서도 "동일 업종 내 동일 등급이라도 실적이나 재무구조 개선 속도가 다른 것은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한 자산운용사의 펀드매니저는 "수익성이나 차입구조를 들여다 보면 등급이 상향되기엔 부족한 기업이 종종 있어 신평사의 신용등급을 그냥 참고만 하는 경우도 많다"고 귀띔했다.

우량채 비중이 압도적으로 늘어나는 '등급 인플레이션'이 심화되면서 시장에서 등급을 인정받지 못하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이재승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달 들어 등급 상향이 A급 우량채에서 BBB급 비우량채로 확산됨에 따라 시장에서 평가하는 등급과 신평사가 부여하는 등급 간 괴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인 예로 지난달 STX팬오션이 발행한 채권의 연 수익률은 6.8%로 발행 당시 연 5.17%였던 'A0' 회사채 민평금리를 1.63%포인트나 웃돌았다. 당시 'A-' 회사채 민평금리도 5.57%로 이보다 낮았다. 민평금리는 3개 민간채권평가사가 산정한 채권가격(금리)의 평균 값으로 해당 채권의 시가를 반영한 것이다. 회사채 발행금리가 민평금리보다 높다는 것은 시장에서 평가하는 채권의 신용위험이 동일등급 채권평균에 비해 높다는 뜻이다.

◆대부분 운용사는 자체평가 결과 우선

사정이 이렇다 보니 회사채 펀드를 운용하는 운용사는 대부분 자체적으로 마련한 내부 평가시스템을 두고 회사채 투자등급을 매기고 있다. 이도윤 한국투신운용 채권운용 본부장은 "신평사의 등급 평가는 부도가 나야 등급을 내리는 등 시장 변화를 시의성 있게 반영하지 못해 내부적인 신용평가의 분석 틀을 마련해 두고 있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형 운용사 관계자는 "건설 해운 등 업황이 부진한 기업의 경우 신평사의 신용등급이 자체적으로 평가한 것보다 3~4등급이나 높은 경우도 있었다"며 등급 평가에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운용사들은 자체 평가시 기업의 '그룹 리스크'나 'CEO 경영리스크' 등에 보다 중점을 두고 있다는 설명이다. 한철진 KB자산운용 채권운용 팀장은 "그룹과 그에 따른 유동성 리스크를 신용등급에 적극 반영하고 펀드 운용 때도 자체 평가 결과를 우선 적용한다"고 말했다. 신용등급 인플레에 대응해 내부적으로 회사채 펀드 투자 기준을 상향 조정한 곳도 있다. 채권혼합형펀드인 '삼성스마트자산배분 1호'는 최근 회사채 투자대상을 'BBB-'에서 'A-'로 3등급 올렸다.

강지연/서보미 기자 sere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