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취임한지 한달된 대우증권 김성태 사장(57)은 회사의 재무제표를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전체 유동성 자산이 11조원인데 단기 콜자금만 1조원에 달했기 때문이다. 콜 자금은 상당부분 고객들의 주식 투자를 위한 신용 대출에 사용되는 자금이었다.

김 사장은 당시 증시가 2000선을 향해 잘나가던 때였지만 앞으로 주가가 무너지면 회사 유동성에 엄청난 타격이 있을 것이란 생각에 아찔했다. 그는 전체 지점에 무조건 신용 융자를 줄이라는 특명을 내려 1조원 넘던 것을 석 달도 안 돼 30% 수준으로 축소했다. 이 과정에서 일선 지점장들은 "신용대출 한도를 늘려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고 있는데 오히려 한도를 줄이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그렇지만 그 해 11월을 기점으로 증시가 꺾이자 김 사장의 혜안은 빛을 발했다. 대출 한도 축소에 강하게 불만을 토로했던 고객들 가운데 일부는 김 사장을 직접 찾아와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숫자는 거짓말 않는다

김 사장 특유의 '리스크 관리' 능력은 숫자에 대한 남다른 통찰력에서 나온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그는 늘 "금융회사는 투명해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는 "숫자를 신뢰하는 데 대해 일부에서는 '숫자 놀음'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숫자를 지배하는 것이 경영의 기본"이라고 강조한다. 대학(연세대)에서 응용통계학을 전공한 것을 시작으로 30년 넘게 관심을 갖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숫자의 힘이 느껴졌다고 한다.

지금도 그는 저녁 7시든 8시든 그날 회사의 손익계산서와 상품 포지션을 일일이 다 확인한 후에야 퇴근한다. 보고하는 해당 임직원들이야 죽을 맛이겠지만 7조원에 달하는 보유 채권의 가격이 얼마인지, 파생상품에서 얼마의 손익이 발생했는지를 하루 하루 체크하다 보면 전반적인 시장의 추세와 흐름이 한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도전해야 성과가 나온다

젠틀한 이미지의 김 사장은 흔히 '신중파'라는 평가를 받지만 알고 보면 도전 정신이 투철하다. 그는 금융위기가 정점이던 지난해 하반기 이례적으로 종합자산관리계좌(CMA) 확장 경영에 나섰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단순한 브로커리지(위탁매매) 업무에 집중돼 있던 사업 구조를 자산관리 컨설팅 중심으로 개편하기 위한 도전이었다. 이 회사는 넉 달 만에 CMA 계좌 수를 20만 계좌에서 60만 계좌로 늘려 증권가의 화제를 모았다.

외국계인 씨티은행을 첫 직장으로 삼은 이유도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해 보고 싶어서였다. 입사 1년 만에 '사수' 역할을 하던 3년차 선배와 팀장이 동시에 회사를 그만뒀지만 그는 다음해 최연소 대리로 승진했다. 영어로 된 수백 페이지짜리 매뉴얼을 달달 외울 정도가 되면서 당시 필립 셔먼 서울 지점장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었기 때문이다.

한국식 '악바리 근성'도 대단하다. 씨티은행이 필리핀과 그리스 호주 등 세계 각국에서 진행하는 직무교육 프로그램에 자진해서 참여해 외환 및 파생상품 트레이더 자격을 따 내기도 했다.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그는 한국은행에서 강의할 정도로 실력을 쌓았고 원 · 달러 선물환 시스템을 국내에 처음으로 도입하는 데도 막대한 역할을 했다.

그는 미국과 유럽, 아시아 각국을 출장 때문에 수도 없이 들락거렸지만 정작 관광은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 뉴욕 월스트리트가에 대해선 '빠삭'하지만 정작 나이애가라 폭포는 가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한다는게 신조이기도 하지만 할 일이 너무 많았다는 설명이다. 그는 "일단 도전해야 성과를 낼 수 있다. 도전한 과제에 대해선 최고의 경지에 다다를 때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는 법"이라고 강조했다.

물론 겁없이 도전했다 낭패를 본 적도 있다. 1980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진행된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했을 당시 옆마을에서 열리던 와인 페스티벌에 갔다가 잘 알지도 못하는 와인들을 시험삼아 맛봤다 술병으로 된통 고생을 했다.

그렇지만 이런 고생 끝에 지금은 분위기에 따라 와인 종류를 달리하며 즐기게 됐다. 술이 세지 않은 그이지만 직원들과 부대끼고 한국식 음주 문화에 익숙해지면서 요즘은 '소맥(맥주와 소주를 섞은 폭탄주)' 몇 잔도 거뜬하다.

◆낭만이 있는 CEO

그는 낮게 깔리는 색소폰 소리를 좋아하고 나훈아의 '사랑'을 즐겨 부른다. 본인 스스로가 '보고 또 보고 또 쳐다봐도 싫지 않은' 사람이 되길 원하기 때문이다. 틈이 날 땐 세미 클래식을 들으며 명상을 하고, 잘 숙성된 레드 와인의 깊은 향을 좋아한다.

직원들의 목소리에는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인다. 말단 사원이라도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제시하면 바로 경영에 반영하도록 한다. 직원들의 조그만 노고에도 피자 파티를 열어 주는 소탈함도 가지고 있다. 작년 말엔 창구 여직원들이 추위를 타고 있다는 얘기에 무릎담요를 선물하기도 했다.

대우증권은 여의도 증권가에서도 내부 결속력이 강하기로 유명하다. 김사장은 이런 노력과 진심이 통하면 '가족처럼 신뢰할 수 있는 든든한 회사'를 만들 수 있고 아시아를 대표하는 리딩 금융투자회사로 거듭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강지연 기자 sere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