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3 주변 버려진 건물 수두룩…"노조가 일자리 53만개 날려"


잔뜩 찌푸린 하늘에 폭설마저 내린 지난 10일 미국 미시간주.디트로이트 시내에서 북동쪽으로 20분을 달려 도착한 크라이슬러 조립공장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발길을 돌려 94번 고속도로를 타고 한 시간을 달려 찾아간 웨인카운티 입실리티에 있는 제너럴모터스(GM) 파워트레인 공장도 멈춰서 있었다. 공장 인근 식당 종업원 제시카는 "GM 공장이 조업을 축소하기 시작한 작년 11월 이후 매상이 평소보다 30% 이상 줄더니 요즘은 개점휴업 상태"라고 말했다. GM 포드 크라이슬러 등 미국 '빅3' 자동차회사의 본사가 있는 디트로이트 일대가 깊은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공장 지역은 물론 시내 곳곳에는 유리창이 깨진 채 버려진 건물이 수두룩했다. 11일부터 '북미국제오토쇼'(일명 디트로이트 모터쇼)가 막을 올렸지만 예전의 떠들썩하던 축제 분위기를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사라진 '자동차왕국' 명성

디트로이트는 지난 100년간 이어진 '자동차 왕국'의 명성은커녕 빅3 몰락의 후폭풍으로 도시 전체가 실직 공포에 휩싸여 있다. 미시간주 하원 예산국은 7일 내놓은 보고서에서 "자동차 분야에서만 2000년 이후 53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졌고 올해는 19만1000개가 더 증발할 것"으로 전망했다. 실직은 자연히 도시 인구의 감소를 초래하고 있다. 1950년대 185만명에 달하던 디트로이트 인구는 현재 90만명 아래로 쪼그라들었다.

빅3에 기대어 연명해 온 자동차 부품업체들의 생존을 건 사투는 눈물겨울 정도다. 익명을 요구한 부품업체 비스테온사 관계자는 "올 들어 주4일 근무체제로 전환하는 동시에 근로자 임금을 20% 삭감키로 했다"며 "이렇게 해서라도 직원들의 일자리를 최대한 지켜보겠다는 계획이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미시간주 폴리머스에 있는 자동차 부품회사 보쉬의 한국계 간부 노규성 부장은 "빅3의 감산으로 미시간 지역 자동차 부품회사들의 매출은 최근 몇 달간 평균 30~50% 급감했다"고 말했다. 그는 "빅3에 근무 중인 50~60명의 한국인 임직원 중 상당수는 집을 담보로 한 마이너스 통장인 '홈에쿼티' 상품에 가입하는 등 실직에 대비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견제 없는 노조 권력이 발등 찍었다"

디트로이트 경제가 고꾸라지면서 빅3 몰락의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지목되는 전미자동차노조(UAW)에 대한 시민들의 반발과 거부감은 갈수록 증폭되고 있다. 지역 유력지인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의 자동차담당 에디터 사라 웹스터는 "UAW는 그동안 파업권을 무기로 빅3가 퇴직자에게까지 연금은 물론 각종 보험 혜택까지 제공토록 하는 등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휘둘러 왔다"며 "그 결과는 회사와 노조,지역 경제를 송두리째 위기로 몰아넣는 부메랑이 됐다"고 말했다.

JP모건 보고서에 따르면 GM이 지난 15년간 노조원과 퇴직자들의 연금과 건강보험을 지원하기 위해 쏟아부은 돈은 1030억달러에 달한다. 이는 GM의 제품 · 품질 · 신기술 투자를 지연시키고 결과적으로 차의 경쟁력 저하를 야기했다는 지적이다. 2007년 기준으로 GM의 매출액 중에서 연구 · 개발 및 자본적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8.7%로 피아트(14.9%) BMW(14.8%) 도요타(11.1%)에 크게 못 미쳤다.

미국 정부는 빅3가 당장 붕괴할 경우의 파장을 우려해 긴급 구제금융을 제공하며 연명을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전제 조건으로 단 '노조의 양보'를 얻어내느냐가 관건이다. GM은 3만1000개의 일자리를 없애고 9개 공장을 폐쇄하며 2007년 체결된 임금협약을 변경하기 위해 노조와 협상 중이다. UAW는 지난 8일 전국 지부 회의를 소집해 빅3 구조조정 계획에 협조하는 방안을 놓고 격론을 벌였지만 아직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한 상태다.

◆썰렁한 모터쇼

11일 막을 올린 모터쇼는 디트로이트는 물론 동반 위기에 빠진 세계 자동차산업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줬다. 일본 닛산자동차가 경영 부진을 이유로 참가를 포기하는 등 단골로 참가했던 글로벌 자동차 업체 상당수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참가 업체들도 화려한 대형 승용차로 눈길을 끄는 대신 '친환경' 등을 내세운 차종으로 출품 모델을 최소화했다. GM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카인 캐딜락 쿠페를 공개할 예정이며 혼다는 도요타의 베스트셀러 하이브리드카 프리우스와 경쟁할 인사이트를 선보일 계획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이 지분 10%를 사들인 중국 자동차 메이커 BYD가 "2025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자동차회사가 되겠다"는 야심찬 계획과 함께 저렴한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카로 주목을 받고 있다.

디트로이트(미국 미시간주)=이상열 기자 mustaf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