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경 기자들과 3시간 人生토크


최수부 광동제약 회장은 제약업계의 수많은 창업자들 중에서도 특히나 고생을 많이 한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기업인이다.

한국경제신문 과학벤처중기부 기자들과 7일 밤 서울 중림동에 있는 허름한 식당에서 가진 'CEO와의 노변정담'에서 그가 풀어낸 이야기 보따리는 장편 드라마를 방불케 했다.

일제시대 자신을 '조센징'이라 놀리던 일본 소학교 반 아이들을 때려눕힌 이야기는 한 편의 '성장 드라마'였다.

80년대 서슬퍼렇던 전두환 대통령 시절 권력 실세와 멱살잡이를 한 일화는 '무협 드라마'에 가까웠다.

평소 어눌한 말투가 콤플렉스 중 하나라는 최 회장은 3시간 여에 걸친 대화 내내 어느 달변가 못지 않은 말솜씨를 자랑했다.

이날 정담은 오는 12일로 일흔세 번째 생일(음력)을 맞는 그를 위해 기자들이 마련한 축하 케이크를 자르며 시작했다.


-올 겨울은 날씨가 따뜻한 편입니다.그래도 회장님 연세 정도면 건강관리에 신경을 쓰셔야 할 텐데요.

"내 얼굴을 보다시피 피부가 고운 편이에요.또 근육이 좋아 이발소 가서 안마 받으면 무슨 운동하냐고 물어봐요(최 회장은 자신의 팔뚝을 한 번 만져보라며 기자들에게 내밀었다). 평소 특별한 점심약속이 없으면 헬스장에 가서 한 시간 정도 운동을 합니다. 그리고 주말에는 골프를 치죠.그런데 운동신경이 둔해서인지 잘 못쳐. 구력은 30년이 넘는데 79타 싱글 스코어는 딱 두 번 해봤어요. 지금까지 홀인원은 한 번도 못해봤고 이글조차도 한 적 없어요."

-건강에는 자신이 있으시겠군요.

"건강철학이 '99 88 234'예요. 무슨 뜻인고 하니 아흔아홉살(99)까지 팔팔(88)하게 살다가 이틀(2)만 앓고 사흘째(3)되는 날 사망(4)하는 겁니다(좌중 웃음)."

-2007년도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새해 초에 특별히 다짐한 것이라도 있나요.

"올해는 꼭 홀인원을 한 번 하고 싶은데…. 이제는 뭐 살 만큼 살았으니 회사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지."

-보통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먹성'이 좋던데요.

"맞아요. 기업하는 분들 보면 체력이나 식욕이 강하지.나도 그래요. 한창 때는 한 끼에 3인분을 항상 먹었으니까. 그러다 보니 하루에 화장실도 꼭 세 번씩 갔지.(웃음)다만 보신탕은 안먹어.불교 집안에서 자란 영향도 있고,몸에 좋다는 것도 특별히 못 느끼기 때문이지요."

-한 달 용돈은 얼마 정도 쓰시나요.

"용돈은 얼마 안 씁니다만 그래도 품위유지하는 데 돈을 좀 쓰지요. 친구들과 만나 술 마시다 보면 나보다 실력도 더 좋고 먼저 돈을 낼 만한 사람도 가끔 있는데도 내가 먼저 돈을 내고 싶어요(최 회장은 지갑을 열어 보여줬다.지갑 속에는 10만원짜리 수표 10장과 1만원짜리 지폐 20장 정도가 들어 있었다).

-와,지갑 속에 10만원짜리 수표가 가득하네요.

"옛날에는 100만원짜리 수표도 넣어 다녔어요. 그런데 한 번은 술이 취해 기분이 좋아 연주자에게 10만원짜리 수표로 팁을 준다는 게 그만 100만원짜리를 줘 버렸어.나중에 얘기해도 시치미를 떼더구먼.그 뒤론 100만원짜리는 안 넣어 다녀.아마 나처럼 술 좋아하는 사람들은 비슷한 실수를 한두 번쯤 한 적 있을 거야."

-회장님께서는 제약업계 오너 중에서도 유독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10년간 자라면서 수모도 많이 당했다던데요.

"(본격적인 질문이 시작되자 최 회장은 '가만,얘기를 제대로 하려면 맨 정신으론 안 되지'라며 맥주와 소주를 섞은 폭탄주를 제조해 돌리기 시작했다.그는 '술이 모자라면 정 없어서 안 된다'며 매번 잔이 넘치도록 채운 폭탄주로 기자들을 괴롭혔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일제시대 때 어린 나이에 돈벌러 일본으로 건너갔어요.그 곳에서 만나 결혼 한 뒤 날 낳으셨지.태어났을 때는 부친의 사업이 번창해 제법 부유했어요.그런데 학교에서는 부모님의 위세가 전혀 안 통했어.일본인 친구들에게 저는 '조센징'에 지나지 않았던 거죠.학교에 다니는 동안 엄청나게 '이지메(집단 따돌림)'를 당했지."

-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다니다 3학년 때 퇴학당한 것도 그것과 연관이 있나요.

"3학년에 올라가자 반 아이들이 우리 부모님까지 '조센징'이라고 놀려대기 시작했어요. 2년 넘게 참아오던 분노가 마침내 폭발하고야 말았지.당시 부친께서 운영하던 공장 공터에서는 종업원들이 검도를 하곤 했는데 거기서 소가죽으로 만든 단단한 검도 호신도구를 주워 얇게 갈아 가방에 넣었어.결전의 순간은 금방 왔어요. 다음 날 학교로 가니 대여섯명이 시비를 걸어왔으니깐.미리 준비해간 '비장의' 무기를 꺼내 닥치는 대로 때렸지.불과 몇 분 사이에 아이들은 하나둘 피투성이가 돼 쓰러졌지.물론 나는 그날로 퇴학당했고."

-1946년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시련이 많았다던데.

"해방이 되고 한국으로 와 대구 달성근처 화원소학교라는 곳에 3학년으로 편입했어요. 이번에는 아이들이 나더러 '쪽발이'라고 놀리며 괴롭히는 거야.그 때 한국말을 제대로 할 줄 몰랐거든.봄 방학을 마치고 방학 중에 있었던 일을 발표하는 시간이었는데,내가 '지는 어무이 따라 친정에 가서 보리타작을 도왔심니더'라고 더듬거리며 얘기했더니 교실 안이 온통 웃음 바다가 돼 버렸어.담임선생님께서 웃으시며 '수부야,친정은 시집간 여자한테나 있는거지,너한테는 친정이 아니라 외갓집이야'라고 고쳐 주시더라고요."

-열두 살에 사실상 소년 가장이 됐다고 하던데.

"한국에 온 뒤 사업을 준비하던 부친께서 사기를 당해 가진 돈을 다 날린 뒤 아무일도 하지 않으셨어요.가세가 급속히 기울었죠.급기야 다섯 살 난 막내동생은 폐렴으로 죽고 말았고.당시 열두 살밖에 안 됐지만 어떻게든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그래서 다니던 학교도 때려쳤지."

-어린 나이에 이만 저만한 고생이 아니었겠네요.

"시쳇말로 아홉 식구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도둑질 말고는 안 해 본 일이 없어요.처음에는 지게에다 땔감을 져다 팔았지요.밑천 한 푼 없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더라고.그 후론 돈 되는 건 뭐든 만들어 팔아봤어요.엿을 만들어 팔기도 했고,담배를 말아서 팔기도 했고,찐빵을 만들어 팔기도 했지."

-젊은 기자들로선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대목인데요.

"땔감을 지게로 팔던 시절이었죠.그 전날 쌓인 피로 때문에 시체처럼 엎드려 자다가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어쩐 일인지 뺨이 바닥에 붙어 꿈쩍도 안하는 거예요.마치 귀신에 홀린것 같았지.알고보니 밤새 흘린 코피가 얼어붙으면서 제 오른쪽 뺨 전체가 장판에 붙은 거야.어머니께서 부랴부랴 물을 데워 20∼30분간 녹인 후에야 일어날 수 있었지.그때 거울을 보니 사람 얼굴이 아니다 싶더라고요."

-형편이 좀 나은 집안에서 자랐다면 뭘 하셨을 것 같습니까.

"내 기질로 볼 때 아마 사법고시에 합격해 진짜 정의로운 법관이 됐을 것 같아.아,그리고 나 정도의 배짱이면 건설업을 해도 좋았을 것 같아요."

-제약업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요.

"1960년 봄쯤 어느 날 한 사람이 동생에게 취직자리를 구해주는 대가로 얼마간의 경비를 요구했어요.취직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인 시절이라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다 마련해 줬지.며칠 뒤 그 사람은 제약회사 외판원 자리를 들고 나타났어요.그런데 선천적으로 수줍음이 많은 동생은 고민 끝에 거절하더라고.그래서 내가 그 회사에 불쑥 취직하겠다고 했지요."

-동생 '대타'인 셈인데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쉽게 하셨네요.

"취직 알선비로 이미 돈이 나간 게 아깝기도 했지만,본인만 부지런히 다니면서 약을 팔면 수당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하더라고요."

-외판원 시절 '판매왕'으로 군림했다던데 타고난 기질 같은게 있었나요.

"이 시절 나 빼고 다른 모든 사원들 수당을 합친 것보다 내가 더 많은 수당을 받았어.입사한 지 몇 달 만에 지금으로 치면 월소득 1000만원이 넘는 고소득자가 된 거지요.어렸을 때부터 장사로 잔뼈가 굵어서 그런지 물건을 파는 게 두렵지 않았어요.굳이 장사꾼 기질을 타고났냐면 잘 모르겠네.아마 배고픔 때문에 후천적으로 장사꾼 기질이 생기지 않았나 싶어요."

-잘 벌 때 씀씀이는 어땠나요. 술집 종업원에게 팁주는 것보니 헤펐을 것도 같은데요.

"동생이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이후 동생의 교복 을 입고 출근하는 날이 많았어요.서울대생 행세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 당시에는 교복을 입고 다니면 일반 버스비의 절반밖에 안 되는 돈으로 회수권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담배는 주머니에 두 갑을 넣고 다녔어.당시 제일 싸구려 담배였던 '파랑새'는 내가 피기 위한 거였고, 최고급 담배였던 '아리랑'은 접대용이었지."

-일화도 많았을 것 같은데.

"외판원을 하던 어느날 다소 엉뚱한 생각이 들더라고요.약을 팔려면 돈 많은 곳에 가야 하는데,사람들한테 우리나라에서 제일 돈이 많은 곳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재무부 이재국이라고 하는거야.재무부 이재국장이면 그야말로 막강한 자리 아닙니까.그날로 재무부 이재국장 방을 찾아갔지."좋은 약이 있어 국장님께 소개해 드릴라꼬 왔심니더"라고 했더니 국장의 얼굴이 일그러지는거야.그러더니 비서를 불러 "어디 감히 약장수 따위를 내 방에 들여보내"라고 호통을 치더라고요."

-약 파는 걸 결국 실패하신 셈이네요.

"그날 밤 잠을 한숨도 못 잤어.온갖 고생을 다했지만 그런 수모는 처음이었거든.고민 끝에 다음날 다시 이재국장을 찾아가 '국장님처럼 존경받는 분이 사람을 면전에 두고 무시할 수 있느냐'고 따졌지.그랬더니 그 국장이 정중히 사과를 해요.약도 무려 16개나 사주더라고요."

-한마디로 두려움 없는 청춘이었군요.

"그건 약과야.한번은 상임위원회가 열리고 있는 국회 회의실을 찾아가 잠깐 휴식시간을 틈타 홍보 전단지를 돌린 적도 있어요.그걸 본 국회의원들은 하도 어이가 없어 화를 내지도 않았어.당시 상임위원장을 맡고 있던 의원은 '내 의원생활 십수년 동안 국회 회의실에 물건 팔러 들어온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오'라고 하더라고요."

-광동제약을 세운 동기는 무언가요.

"사실 회사를 세운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인데,동기는 아주 간단했어.남이 만든 약을 팔기만 하는 것보다 직접 만들어 파는 게 더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았거든."

-한때 제약회사 허가가 취소된 적도 있다지요.

"65년에 관리 약사가 바뀌는 바람에 약사 명의를 변경해야 했어요.

약사 명의가 정확히 돼 있지 않으면 제약 사업 자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무척 중요한 일이었지.당시 총무부장한테 3만원을 주면서 그 일을 맡겼지.그런데 몇 달 후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로부터 관리 약사가 없으니 회사 허가를 취소한다는 통보가 왔어요.날벼락 같은 소식이었지."

-이유는 알아보셨나요.

"나중에 총무부장을 추궁했더니 자기가 사귀던 술집 아가씨가 임신을 해서 낙태 수술을 하는 데 돈을 썼다고 하더군.광동제약 40년 역사상 최초의 무면허 사태가 한 술집 아가씨의 임신에서 비롯된 셈이지요."(웃음)

-감옥소에 갔다온 적도 있다던데.

"하하,감옥소라고 하니 무슨 큰 죄를 지은 것 같네.77년 당시 야당 국회의원 보좌관을 하던 양반이 광동제약의 대리점을 하나 내달라고 하기에 그렇게 해줬지.그런데 이 사람이 약품 구입 대금을 한 번도 입금시키지 않아 약품 공급을 중단했더니 자신이 모시던 국회의원을 찾아가 광동제약을 음해하는 온갖 거짓 정보를 줬어요.그 의원이 임시국회에서 광동제약이 약사법을 위반하고 탈세까지 하고 있다고 폭로했지.얼마 후 법원으로부터 영장이 발부됐고,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어요."

-전과자가 되신 거네요.

"다행히 고등법원에서 1심을 뒤집고 무죄를 선고하는 바람에 풀려났어요.웃긴 건 그 후 몇 년 뒤인 1981년 광동제약은 국세청장으로부터 모범 납세자 표창을 받았다는 거야.탈세혐의자로 몰렸다가 모범납세자 상을 받았으니 참 코미디 같은 일인 셈이지."

-사람들은 최수부 회장 하면 '최씨 고집'을 떠올리는데요.평소 '최씨 고집'이란 한방 과학화의 외길을 간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하셨습니다.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광동제약의 히트상품 '비타500'은 외도를 하신 건가요.

"(잠시 머뭇거리다)제조업은 한쪽으로만 해서는 리스크가 너무 많아져요.적당하게 리스크를 분산시킬 수 있는 다양한 제품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비타500을 만든 것도 그런 이유라고 보면 돼요."

-비타500은 비,이효리 등 인기절정의 스타를 광고 모델로 쓰는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비타500을 히트 상품으로 키워야겠다는 야심이 있었기 때문에 톱 모델을 쓴 거예요.그래서 7억원 주고 비와 계약을 했죠.솔직히 그때만 해도 비가 지금처럼 대스타는 아니었고 광동제약도 그랬지.나중에 들으니 비가 어디 가면 사람들이 비타500이라고 부른다고 하던데."

-혹시 살면서 학력 콤플렉스 같은 건 없으셨나요.

"콤플렉스 같은 건 없었어요.그러니깐 사람들한테 다 공개했죠.내 동생이 서울대를 나와 행시를 합격했는데 둘이서 가끔 '인생'에 대해 얘기하다 보면 '넌 유치원생이다'고 내가 충고할 정도는 되니까."

-네 분 따님에 사위 세 명을 보셨는데 누가 제일 마음에 드십니까.

"허허 이사람,사위들이 신문 다 볼텐데 그런 걸 얘기하라면 곤란하잖아.(좌중 웃음)"

-그럼 사위 흉이라도 좀 보시죠.

"(손사래를 치며)아,보기 싫어.큰 사위부터 셋째 사위까지 다들 훌륭해.(최 회장의 첫째 사위는 개인사업을 하고 있고,둘째는 미국에서 치과의사로 활동 중이며 셋째사위는 광동한방병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어렵게 얻은 막내 아들(최성원 현 광동제약 사장)은 어떻습니까.효자인가요.

"(아들 얘기가 나오자 최 회장의 표정은 순간 밝아졌다)아,정말 잘해요.한번은 난 솔직히 약장사 하면서 고생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물려 주고 싶지 않다고 얘기하면서 보름 생각해보고 오라고 했어요.그때 아들이 30대 초반이었는데,2주 후에 '아버지가 고생 고생해서 회사를 세우셨는데 열심히 해서 빛을 내 보겠습니다'고 하더군요."

정리=김동윤 기자 oasis9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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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경영자(CEO)는
"기업을 경영하는 CEO는 움직이는 광고판이다.그가 만나는 사람들이 그를 통해 회사의 이미지를 가늠하기 때문이다."

▶ 제약인은
"제약회사를 경영하는 기업인은 남다른 도덕성이 필요하다.생명을 다루기 때문이다.부도덕한 제약인은 살인 용의자다."

일본을 자주 찾는 이유는
" 규슈쪽에 가면 어릴적 날 괴롭히던 친구들을 떠올리며 '나 이정도로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어 좋다."

욕심이 있다면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일을 하고 싶다.마지막 순간까지 소비자를 위해 좋은 약재를 고르다가 그 자리에서 숨이 멎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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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회장은

최수부 회장의 이력서에는 고향이 대구 달성군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일본 규슈 지방의 후쿠오카 시가 출생지다.부친이 일본에서 해방 직후까지 사업가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1934년 5남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수부(秀夫·히데오)는 당시 부친이 지어 호적에 올린 일본식 이름이다.

1960년 군 복무를 마친 후 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취직했다.3년 연속 판매왕에 오르면서 큰돈을 모아 1963년 광동제약을 창업했다.변비약 '쾌장환'과 부인병 치료제 '비너스환'에 이어 '우황청심원''쌍화탕' 등이 잇따라 성공하면서 제약업계 유망 최고경영자(CEO)로 부각됐다.

2001년에는 회사 역대 최고 히트 상품인 '비타500'을 선보여 광동제약을 10대 제약사로 발돋움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