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소설 삼국지에 견줄 만한 우리나라 삼국지를 써보기로 결심한 건 95년 봄이었다. 내 인생에서 딱 10년만 투자하자.그러면 제법 읽을 만한 우리 삼국지의 초본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나름대로 각오를 다지고 벽지에 틀어박힌 건 그해 세밑인 이맘때쯤,내 나이 서른 다섯의 일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일은 밤에 하고 낮엔 잠을 잤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사람도 안 만났다. 완벽한 도치와 도취의 세월이었다. 을지문덕이 수나라 대군을 격파하거나 김유신이 술에 취해 방황하던 사정은 내 집안 일처럼 훤했지만 현실 세계의 일은 한동안 머리를 굴려야 간신히 기억이 날 정도였다. 하고 싶은 일을 하니 시간은 금방 갔다. 그러나 문제는 생활고였다. 수입이 없으니 살림살이가 구차해지는 건 불 보듯 뻔한 노릇이었다. 2년도 지나지 않아서 모든 것이 바닥났다. 무모함에 대한 응분의 결과일 테지만 사정은 극에 달했다. 카드는 막히고 더 이상은 빚조차 낼 수 없었다. 당연히 책도 자료도 구할 길이 막연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 시절을 버텨냈는지 모르겠다. 오기도 있었지만 운도 좋았다. 그 행운 가운데 으뜸은 사방에서 답지한 선후배들의 애정 어린 책 선물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분들이 소문을 듣고 평생을 바쳐 연구하고 수집한 자료들,필생의 노작,역작들을 흔쾌히 보내주셨을 때는 정말이지 눈물이 났다. 그것은 내가 지쳐 쓰러질 때마다 쓰러진 그곳에서 다시 일어서도록 도와주는 지팡이가 되고 버팀목이 되었다. 그 덕택에 나는 '삼한지' 10권의 초본을 들고 7년 만에 살아서 벽지를 걸어나올 수 있었다. 인터넷과 휴대폰이 아무리 활개를 쳐도 고급한 소통은 여전히 책과 활자를 통해 이뤄진다. 저자의 메시지가 독자 개개인의 사유(思惟)와 만나면 가공할 시너지효과를 창출하는 게 책의 마력이다. 상황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지금은 모두 어렵고 고단한 시기를 살고 있다. 과거의 내가 그러했듯 이럴 때 내가 쓴 글이 주위의 어려운 분들에게 미력이나마 도움을 준다면 얼마나 좋으랴.'천지지간 만물지중'에 아직까지 '책 만한 선물'은 없다고 나는 믿는다. kim-jungsan@hanmail.net